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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0

PC게임의 역사 4

70년대말~80년대초의 미국 아케이드-콘솔 시장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아케이드 센터가 전국에 13000여개가 있었다고 하며 팩맨은 아타리 콘솔로만 7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80년대초에 이미 콘솔게임은 완전히 메이저한 대중문화였던 것이다. 콘솔게임이 마치 최근에 와서야 대중적인 문화가 된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콘솔게임은 처음부터 대중문화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80년대 초중반에 '아타리쇼크'로 알려진 아케이드-콘솔시장의 갑작스런 대 붕괴가 발생한다. 시장이 서서히 쪼그라든게 아니라 그냥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은 것이다. 왜 이런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당시 게임들을 직접 플레이 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과도하게 핀볼적인 방법론에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핀볼은 플리퍼 등장이후로 기본 형식이 변화한적이 없다. 플리퍼로 공을 쳐올려서 오래 버틴다는 한가지 형식으로만 수십년동안 버텨왔고 문제없이 잘 팔아먹었다. 그래서 전자 디지탈 게임도 그런식으로 해나갈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핀볼처럼 2D 레이아웃에 공을 움직이거나 총알을 쏜다는 식의 기본 형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만들어댔지만 거기에는 핀볼로부터 가져오지 못한 중요한 한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공의 움직임의) 무한한 다양성이다. 공의 움직임은 형편없이 단순했고 총알은 일직선으로만 나갔고 타겟의 등장순서는 매번 동일했다. 핀볼과 달리 패턴이 쉽게 반복됐고 쉽게 질렸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게임을 공급해서 양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들이 기본형식 자체에 익숙해져서 더이상 어떤 바리에이션에서도 신기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얄팍한 게임성의 맨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다. 90년대말 2000년대 초반의 DDR열풍 말이다. 나라전체가 DDR로 들썩거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확 꺼지면서 언제 그런게 있기나 했냐는 듯이 사라지는걸 경험하면서 아! 아타리쇼크가 바로 이런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난리났던 스타크래프트는 열기가 오랜기간에 걸쳐 서서히 식은반면 왜 DDR은 갑자기 푹 꺼졌을까. 스타크래프트는 신기함이 사라진후에도 오래 지속될 게임적 깊이와 다양성이 있었지만 DDR은 신기함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핀볼이 몸을 안쓰고 손가락만 써서 흥했는데 비디오게임으로 그것이 일반화되자 다시 손가락을 안쓰고 몸을 쓰는 게임에 사람들이 신기함을 느껴버린것. 그러나 몸을 쓰는 게임이 더 원초적인 것이니 신기함이 오래 지속될수가 없다.

미국의 콘솔게임 역사도 그런식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너무나 깨끗이 너무나 깔끔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후에 비디오게임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미국에는 그냥 아케이드-콘솔 역사 자체가 없었던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남긴게 전혀 없지는 않다. 비디오게임에는 코딱지만큼의 깊이도 없어서 초딩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라는 최악의 부정적 사회 인식을 남겼고 더이상 '문화'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코난 오브라이언같은 사람을 보면 그때의 반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아직까지도 어른이 비디오게임하는걸 뭔가 웃기고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는게 방송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콘솔게임의 뿌리는 당구까지 내려가는데 당구하는 어른을 그렇게까지 볼까? 이 모든게 퐁의 성공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다. 거봐 퐁이 없었으면 더 좋았다니까.

이후로 미국은 콘솔게임을 버리고 핀볼과 퐁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 PC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중심으로 전자 디지탈 게임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미국이 버린 콘솔게임의 형식은 일본이 주워가서 발전시키게 된다. 그래서 이때부터 PC게임=서양게임, 콘솔게임=일본게임 이라는 요상한 구도가 되어버린다. 80년대부터 전자 디지탈 게임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이 구분이 아주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일본으로 넘어간 아케이드-콘솔게임은 아타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차피 공의 움직임에서는 핀볼을 따라가지 못하니 아예 공이 없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다. 그래서 레이싱, 격투, 스포츠, 퍼즐, 점프 기타등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다양하게 활용했는데 안타깝게도 단지 '공'을 없애고자 했을뿐 '핀볼'을 없애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공이 없는 핀볼'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 아케이드 게임에는 여러가지 장르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기본형식이 있었다.
-한판에 5~30분 정도의 플레이 타임에 맞춘 밸런스
-한판에 3개의 목숨
-특정 아이템을 먹거나 정해진 점수를 넘으면 목숨 보너스
-게임 컨텐츠의 끝에 도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반복하는 순환구조
-획득한 점수로 등수 기록
-등수 기록시 3개의 이니셜로 이름 새김
-Game over, 1-up 등의 핀볼 용어 사용
-동그란 형태의 버튼
-극단적으로 빠른 플레이 리듬, 게임내내 쉼없는 컨트롤러 조작
-매뉴얼이 필요없이 바로 알수있는 간단한 게임방식

이 모든게 핀볼에서 그대로 가져온 형식들이다. 이걸보면 비디오게임은 일본으로 넘어왔어도 여전히 핀볼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는걸 알수있다. 이제 그당시 확립된 대표적인 아케이드-콘솔 장르들을 간단하게 점검해 보자.



먼저 전통의 슈팅
그라디우스 (1985)
기본 형식은 아타리 시절과 별 다를바 없지만 총알의 다양한 움직임과 레벨업, 배경 스크롤을 활용해 최대한 단조로움을 덜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하드웨어가 발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거대한 레벨디자인을 만들어낼수 있게 되었지만 목표점이 여전히 '핀볼'이었기 때문에 코딱지만큼이라도 난해한 레벨디자인은 용납될수 없었고 그냥 한쪽 방향으로만 스크롤되는 순차적인 레벨디자인을 사용하게 된다. 덕분에 핀볼에 비해 지독한 선형성이 발목을 잡는다.

5~30분의 플레이 타임을 맞추기 위해 난이도는 선형적으로 어려워지는데 컨텐츠 제공까지 일방향이라면? 처음 30분 분량만 좆나게 반복하게 되는거다.-_-; 그래서 슈팅게임은 암기과목이 되어버린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져서 한번에 암기가능한 분량은 점점 줄어들어가며 이미 암기되어 있는 부분은 너무 많이 플레이해서 오바이트가 나올거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 뭐 그런 병신같은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장르는 망해버린다. 현재는 탄막슈팅이라고 총알이 막 무더기로 쏟아지는걸 피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는데 왜냐면 이게 그나마 선형성이 덜하기 때문이다. 총알회피가 암기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라서 여러번 반복해도 다른 상황이 자주 나오는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핀볼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수는 없다.



건슈팅
오리사냥 (1984)
비디오게임의 슈팅은 핀볼의 변형이지만 1인칭의 건슈팅 장르는 핀볼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냥 놀이공원에 있는 인형맞추기 슈팅게임같은걸 그대로 가져온거니까. 이것도 핀볼 이상으로 오래된 장르일 것이다.


시버그 레이오라이트 (1936)
1936년에 나왔다는 무려 빛센서를 이용한 건슈팅 게임이다. 오리사냥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지? 이 장르는 FPS 나오면서 흡수됐다고 봐야할지 콜옵이 충실하게 계승했다고 해야할지...-_-;



아케이드 레이싱
아웃런 (1986)
자동차를 소재로한 뭔가 완전히 새로운 장르인듯 보이지만 아케이드 레이싱은 실은 고전적인 슈팅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르다. 모습만 자동차일뿐 차제가 회전을 하는게 아니라 레일 안에서 좌우로 사이드스텝을 한다. 그러니까 퐁에서 막대기가 좌우로 움직이는거나 슈팅게임에서 비행기가 좌우로 총알을 피하는것처럼 움직인다는거다. 이런 움직임으로 무슨 진지한 레이싱이 가능할리가 없기 때문에 다른 차량이나 장애물과의 충돌을 피해 움직이는게 게임플레이의 주가 된다. 결국 총알을 피하는 대신 차와 커브를 피하는 스킨만 다른 게임이 된것이다.

물론 90년대 중반부터 3D그래픽이 아케이드시장에 도입되자마자 이 포맷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진짜 3D레이싱 게임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방식은 아케이드-콘솔쪽에서 발생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PC게임쪽에서 발전했던 레이싱시뮬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아케이드시장에 맞게 단순화/간소화 시켰을뿐이었다. PC쪽의 여러 시뮬레이터 장르중에서 유일하게 아케이드-콘솔쪽으로 넘어온게 레이싱인데 그 이유는 레이싱 자체가 핀볼처럼 끊임없이 동적이고 연속적이며 인터페이스가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비행시뮬은 수많은 계기를 조작해야 하고 외워야 할게 산더미같이 많으며 잠수함시뮬은 거기에 더해 극도로 정적이기까지 하다. 유일하게 레이싱시뮬만이 머리보다 몸으로 익히는게 중요하다. 핀볼의 철학과 맞지 않는 시뮬레이션 장르임에도 고전적인 공놀이게임의 특성인 신체적/연속적/동적 특성에 완전히 부합하므로 별다른 변형 없이도 그대로 사용이 가능했던것이다. 그래서 이 장르는 2D에서 3D로 변하자마자 PC게임에게 먹힌 장르이다. 마리오카트 정도가 아케이드 레이싱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
슈퍼 발리 볼 (1989)
원래 핀볼은 공놀이의 간소화다. 쉽고 편한 공놀이가 핀볼인것이다. 그럼 공놀이를 쉽고 편하게 할수 있으면 굳이 핀볼일 이유는 없는것이다. 그래서 농구, 축구, 야구, 배구 등등 메이저 공놀이를 그대로 카피해서 쉽고 편하게 비디오게임으로 즐길수 있게 만드는것만큼 핀볼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핀볼의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은 없다. 공의 움직임은 현실을 쫓아가지 못하지만 대신 핀볼에는 없는 다수의 플레이어 캐릭터 활용과 좀더 복잡한 룰이 재미를 보충한다. 워낙 익숙하고 친숙한 게임들이라 신기함이 빠져서 한번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이고 꾸준하게 인기를 지속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살아남은 게임을 카피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 장르가 시뮬레이션으로 변할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핀볼보다도 더 원시적인 순수 공놀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플랫포머
수퍼 마리오 부랄더스 3 (1988)
슈퍼마리오로 대표되는 플랫포머 장르는 '공없는 핀볼'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으나 공이 없다기 보다는 공을 공이 아닌것처럼 위장한것에 가깝다. 그게 뭔소리냐고? 슈퍼마리오의 기본 메카니즘을 살펴보자. 점프 버튼을 누르면 마리오가 위로 솟구치고 정점에서 머리로 블럭을 때린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데 스틱으로 착지 지점을 조절하며 착지에서 괴물을 밟아 죽인다. 마리오가 바닥이 없는 구멍으로 빠지면 죽는다. 핀볼의 기본 메카니즘은? 플리퍼 버튼을 누르면 공이 위로 솟구치고 정점에서 타켓을 때린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데 넛지로 착지 지점을 조절하며 플리퍼로 공을 받는다. 공이 플리퍼 아래쪽의 구멍으로 빠지면 죽는다. 기본이 핀볼하고 똑같다.

왜? 못믿겠는가? 그럼 아예 대놓고 커밍아웃한 소닉을 보면된다. 소닉은 마리오처럼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않는다.

캐릭터가 그냥 아예 핀볼 공이 되어버림ㅎㅎ

움직임도 핀볼 공처럼 슝슝 날아다니고 통통 튕김ㅎㅎ
레벨디자인에는 그냥 대놓고 플리퍼, 범퍼, 슬링샷, 레인같은 핀볼 장치들을 아무 변형없이 그대로 집어넣음ㅎㅎ










그냥... 핀볼을... 만드시죠...

그래서 그냥 핀볼도 만들어버림ㅋㅋㅋㅋ 제목은 소닉's 핀볼이 아니라 소닉 스핀볼











이 장르도 핀볼보다 공의 움직임이 훨씬 단순하기 때문에 기본 플레이의 밀도가 떨어지므로 핀볼에는 없는 스크롤되는 커다란 레벨디자인으로 부족한 밀도를 메꿔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슈팅장르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선형성을 불러온다. 선형성은 핀볼과 같은 중독성이 핵심인 게임에서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다. 소닉은 난이도를 낮추고 길을 여러개 만들어 둬서 타임어택을 유도해 선형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슈퍼마리오는 월드맵 개념을 발전시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핀볼에 비하면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것은 어쩔수 없다.



스크롤 격투
파이날 파이트 (1989)
스크롤 격투게임은 공을 없애는데는 확실히 성공한 장르다. 가끔 뭘 던져서 맞추기도 하지만 메인은 근거리로 붙어서 적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적도 플레이어를 두들겨 패려고 하기 때문에 근거리에서 미묘한 간격/타이밍 싸움이 발생하는데 AI가 매우 후지기 때문에 단조로운 타이밍 싸움을 여러마리의 적을 한번에 쏟아부어 양으로 해결한다. 이 타이밍 싸움은 슈팅장르의 총알과 여백처럼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것이 아니고 적도 항상 똑같은 길로만 이동하는게 아니라서 슈팅처럼 토악질 나오는 암기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스크롤되는 배경과 동일한 적의 등장순서 때문에 선형성의 문제를 안고있다.



테트리스
아타리 테트리스 (1988)
'공없는 핀볼'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는 웃기게도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의 한 개발자에 의해 태어난다. 테트리스에는 핀볼과 핀볼이 아닌것들이 전자 디지탈 환경 안에서 완벽하게 조합되어 있다. 핀볼과는 반대로 블록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고(핀볼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공을 쏜다), 핀볼과는 반대로 위로 넘치지 않게 해야 하며(핀볼에서는 아래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핀볼과는 다르게 블록이 격자에 의해 디지탈적으로 움직이며(핀볼은 아날로그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다), 핀볼과는 다르게 블록을 끼워맞추는 퍼즐인데(핀볼은 퍼즐이 아니라 공놀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핀볼처럼 중력이 존재하는 상하로 길게 세팅된 2차원 게임공간 안에서, 핀볼처럼 실시간으로, 핀볼처럼 1인용으로, 핀볼처럼 극단적으로 빠른 플레이 리듬을 지니고, 핀볼처럼 끊임없는 컨트롤러 조작을 요하고, 핀볼처럼 완전히 비선형적이어서, 핀볼처럼 실력이 붙으면 아무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인지 게임이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트랜스 상태에 빠져 시간가는줄 모르는 미칠듯한 중독성을 지니면서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이 완전하게! 완벽하게! 마치 원래부터 이런게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조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공이!!! 없는데!!! 마치!!! 핀볼을!!! 하는것!!! 같애!!!

퐁이 결과적으로 꿈꿨지만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는 몰랐던 그것이 테트리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디지탈 퍼즐로 아날로그 공놀이의 재미를 재현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정도면 핀볼을 뛰어넘었다고는 못해도 핀볼과 동급인 게임이라고 할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핀볼은 기본 메카니즘은 그대로 두고 테이블 디자인만 바꿔도 계속 새로운 느낌으로 플레이 할수 있었으나 테트리스는 그게 불가능했다. 아무리 퍼즐 메카니즘을 바꿔봤자 테트리스만큼의 직관적이면서도 부담없고 그러면서도 퍼즐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기막힌 메카니즘을 쉽게 찾을수는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핀볼의 모든 조건을 만족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재탕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드디어 황무지에서 인간을 대체할 슈퍼뮤턴트를 만들어냈는데...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대전격투
스트리트 파이터 2 (1991)
돈버는게 목적인 아케이드-콘솔게임이 재탕이 안되면 무슨 소용? 그래서 대전격투가 나오게 된다. 물론 대전격투 게임은 아주 초창기부터 존재하던 장르였지만 91년에 나온 스트리트 파이터2는 대전격투 장르의 기본을 새로 쓴다. 스트리트 파이터2에 대한 얘기는 다 아는 얘기니까 자세하게 쓰지 않겠다. 이후에 벌어진 일만 봐도 이 게임이 어떤 의미였는지 대충 알수있다. 한국에서도 그당시 '오락실'에 다녔던 아케이드 게이머였다면 순식간에 오락실의 기기들이 대부분 스트리트 파이터2로 대체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다양한 장르의 기기들이 공존했지만 스파2가 나오자 마자 그런 다양성은 몰살되고 오로지 스파2, 이후에도 오로지 또다른 대전격투게임만 줄창 나올 뿐이었다. 왜? 돈버는게 목적이니 돈이 많이 들어오는 기기로 대체하는게 당연.

대전격투는 기존의 아케이드-콘솔게임의 주 장르였던 스크롤 형식의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선형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대전 상대인 '사람'을 필요로 하긴 했지만 게임을 못할 정도로 공급이 딸리는 일은 없었고 업주 입장에서는 일타이피로 돈을 버니 더 좋았다. 선형성 문제가 해결되서 사람들이 쉽게 질리지도 않고 어설픈 움직임의 공도 없고 회전율도 더 빨라지고 재탕도 쉽고 우와 이거 뭐 거의 꿈의 아케이드 게임이네. 그래서 90년대는 대전격투의 시대가 된다. 결국 '공없는 핀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대전격투도 게임 내적인 문제가 있었다. 강한 기술을 쉽게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요상하고 복잡한 커맨드 입력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입력의 어려움이 아니라 어려움을 위한 작위적인 어려움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장르에 익숙해지고 역치가 높아지자 더 깊이 있는 게임을 요구하게 되면서 기술의 종류도 갈수록 많아지고 커맨드 입력도 점점 어렵게 된다. 콤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기나긴 콤보가 하나의 기술이 되고 이 기술을 위한 입력 커맨드는 미친듯이 길고 어려운 타이밍 맞추기가 된다. 결국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돌리는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야 하는 이상한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편하고 쉬운 심심풀이오징어땅콩이라는 핀볼의 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특성이라 다시 시장의 축소를 가져오게 됐고 아케이드 시장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리듬게임
비트매니아 (1998)
 핀볼이 대전격투를 통해 타이밍 맞춰서 빠르게 버튼 누르는 게임으로 변하자 뭐 쓸데없이 격투를 주제로 하고 그러냐 그냥 엑기스만 뽑으면 되지^^ 해서 리듬게임이 나온다. 이 장르는 화면에 여기 누르고 저기 누르세요 하고 표시가 나오는걸 보고 타이밍 맞춰서 딱딱 누르면 된다. 그냥... 할말이 없다. 아케이드-콘솔게임의 기나긴 방황의 역사는 결국 이렇게 결론이 난것이다. '화면의 표시에 맞춰 버튼을 누르시오.'



퐁에서 시작된 전자 디지탈 아케이드-콘솔게임의 역사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50년간 핀볼을 목표로 정진해왔지만 거기에 다다른 게임은 테트리스와 대전격투뿐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라는 인류의 혁신적 기술로 만들어낼수 있는 게임의 한계치가 정말 그정도 뿐인가? 왜 하필이면 핀볼을 모델로 잡는가? 핀볼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임인가? 애초에 핀볼은 당구가 그랬듯이 편함과 쉬움을 얻기 위해 공의 움직임을 2차원으로 제한한 게임성을 타협한 물건이다. 게임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게임도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돈을 벌기에 적합한 모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콘솔게임이라는건 게임 이전에 돈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타이밍 맞추기 게임은 근본적으로 디지탈이 아날로그를 이기기 어렵다. 게임의 전자 디지탈화에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면 타이밍 맞추기 게임 따위 애초에 만들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콘솔게임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하다. 전혀 맞지 않는 옷인데 그걸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콘솔게임에서는 게임의 전자 디지탈화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것이다. 그냥 고전적인 공놀이 게임이 타이밍 맞추는 게임이니까 그걸 생각없이 따라할 뿐이다. 그래서 콘솔게임의 역사는 50년이 아니다. 콘솔게임에서 전자 디지탈화는 단지 기술의 발전이었을 뿐 개념의 변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류가 되어버렸으니 전자 디지탈 게임의 진정한 발전은 요원한 것이다.

따라서 콘솔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들도 게임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핀볼에 박혀있다. 핀볼적이지 않은 게임은 게임취급도 안한다. 예를들어 볼까? 콘솔게이머들은 게임은 배우기 쉽고 마스터하기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걸 핀볼보다 더 완벽하게 구현한 게임이 어디있나. 핀볼은 버튼 두개가 전부다. 게임로직이라고는 그냥 공을 쳐서 안떨어뜨리는게 전부다. 근데 마스터 가능한가? 영원히 공을 안떨어뜨릴수 있나? 영원히 불가능하다. 무한프레임, 무한해상도 때문에 깊이가 끝이없다.

또 취향 안타는 게임이 훌륭한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만큼 취향 안타는 게임이 존재하나?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수 있고 아무런 사전지식도 필요하지 않다. 외울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버튼 두개를 누를수 있는 손가락만 있으면 된다. 그들이 말하는 취향을 타지 않는 게임이란 핀볼같다는 말과 동의어다.

타격감이 쩔어야 한다고도 한다. 근데 내가 해본 어떤 콘솔게임도 핀볼만큼 타격감이 있는 게임은 없었다. 아무리 화면이 번쩍이고 움직임이 경직되고 쾅쾅 소리가 나봤자 핀볼에 비하면 타격감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쇠공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날아다니면서 실제 사물을 때려대는 진짜 타격감을 느껴보면 전자 디지탈 디스플레이로 뚝뚝 끊기는 조잡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타격감을 느껴보려는 시도 자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게임은 30분 해봐서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의 게임 밸런스가 대충 한판에 최대 30분을 잡는다. 그이상 길어지면 돈을 많이 못버니까. 그래서 핀볼에서는 동전 하나 넣고 30분 했으면 아주 뽕을 뽑은 것이고 그 게임을 잘 한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30분 해도 재미없었으면 재미없는 핀볼이지.

게임은 플레이 내내 끊임없이 플레이어의 흥미를 유지시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도 한다. 핀볼은 수동적인 게임이다. 내가 원하는 때에 공을 때리는게 아니라 공이 때릴 위치에 오면 반드시 공을 때려야 하는데 그 빈도가 아무생각도 안들만큼 짧은 간격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핀볼은 오래하다보면 내가 공을 치는게 아니라 공이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것처럼 느껴진다. 공이 살아있는 동안은 게임을 멈출수가 없다.

게임은 스트레스 받으면 안된다고도 한다. 원래 핀볼은 스트레스 없고 편하고 쉬운 심심풀이오징어땅콩이라니까.

많이 팔리는 게임이 좋은게임이고 잘만든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은 자본집약적이다. 아주 정교한 기계장치인데 대량생산을 해야 하므로 큰 공장이 필요하다. 큰 공장을 유지시키려면 돈이 많이 벌려야 한다. 그래서 핀볼에 대중성과 상업성은 필수불가결이다. 다른 공놀이들과 다르게 막대한 자본 없이는 핀볼이 존재할수가 없다. 핀볼은 게임 이전에 '산업'인 것이다.

게임에 대한 이러한 인식들은 다 핀볼의 철학이지 게임이라는 매체 전부를 통괄하는 철학이 아니다. 핀볼은 게임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뿐인데 그걸 전자 디지탈 게임 전체에 요구하는 꼴인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잖아? 오히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지. 그래놓고는 나보고 뭐? 게임을 보는 관점이 편협하다고? 아니, 너네들이 편협한거야. 내가 보수적이라고? 아니, 너네들이 보수적인거야. 내가 꼰대라고? 아니, 너네들이 꼰대야.

그리고 너네들을 그렇게 만든 모든 원인은 퐁에 있는거고.

퐁 개새끼 해봐.

콘솔게임의 역사는 이걸로 마치고 다음편부터 본격적인 PC게임의 역사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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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PC게임의 역사 3

2차대전후 전자공학의 발전은 컴퓨터라는 고성능 계산기를 탄생시켰다. 초기의 컴퓨터는 대학 연구실에서나 볼수있는 과학장비였고 개인용도로 쓸 일은 전혀 없었다. 이걸 가지고 놀던 연구자들이나 학생들이 지들끼리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서 놀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놀란 부쉬넬이라는 학생이 그걸 보고 컴퓨터로 만든 게임도 핀볼처럼 아케이드로 시중에 팔아먹으면 돈이 될거라고 생각하고는 아타리라는 회사를 차려 퐁이라는 이름의 전자 디지탈 게임을 만들어 팔아먹기 시작했다.

최초의 상업용 비디오게임이라는 뽕. 이 아니라 퐁 (1972)
 이게 바로 1972년에 나온 퐁이다. 핀볼과는 다르게 혼자서 할수 있는 게임이 아니고 두명이 다이얼 하나씩 붙잡고 돌리면 좌우에 있는 막대기가 상하로 움직이면서 공을 치고 받아내는거다. 한마디로 줄이면 그냥 에어하키다.(...) 당시에는 탁구라는식으로 소개된 모양인데 이게 탁구면 팔러바가텔도 당구지.-_-; 실은 탁구는 커녕 에어하키보다도 한참 후진 게임이다.

뽕 아니 퐁을 하느니 차라리 이걸 하고 말지
당시의 프로세서 성능상 공의 3차원 움직임은 고사하고 2차원에서의 움직임조차 전혀 구현하지 못했다. 가속도, 마찰력, 모멘트같은 물리적 성질은 전혀 구현이 안됐고 그냥 점이 등속도로 위치를 이동하다가 벽에 닿으면 90도로 방향을 전환할뿐이다. 이런 형편없는 공의 움직임에는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재미가 전혀 없으므로 핀볼과 다르게 게임 메카니즘이 아닌 외부의 요소, 즉 예측 불가의 대상인 '사람'을 상대로 넣어서 재미를 확보하려고 한거다.(...)

도대체 이런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억지로 공게임을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뭘까? 당시의 원시적인 컴퓨터 기술로는 이런 실시간 공게임보다는 턴제 게임을 구현하기에 훨씬 편하고 무리가 덜했을텐데. 왜긴왜야 턴제게임은 한판에 시간이 오래걸리니까 회전율이 낮아서 돈을 많이 못버니까 그렇지. CRT까지 들어간 거대한 덩치의 전자기기를 보드게임마냥 싼값에 대량으로 찍어 팔아먹을수도 없고 결국 핀볼처럼 동전넣고 잠깐 할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뭐다? 뭐긴뭐야 그냥 전자 핀볼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외엔 답이 안나오지. 수천 수만년간 인간이 만들어온 게임이 다 턴제게임 아니면 공게임인데 턴제가 안되면 공게임 밖에 남는게 없고 공게임 가지고 최대한 빠르게 돈을 뽑아내는 방법을 수십년간 정제하고 최적화한 끝에 나온게 핀볼인데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주어졌다고 해도 거기서 벗어난 다른 방법을 한순간에 찾아낼수가 있을까? 없지. 그래서 퐁이 저따위로 나온거다. 어설프게 핀볼을 베껴보려고 했지만 택도 없는 수준의 형편없는 게임으로.

근데 어처구니 없게도 이게 나오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무려 핀볼과 경쟁할정도로. 게임성으로 따지면 당시의 발전된 핀볼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진걸까? 그걸 몰라서 묻니? 신기해서 그렇지 신.기.해.서. 이미 당구가 있었는데도 팔러 바가텔같은 개병맛 게임이 인기를 끈것과 똑같이 전자기기로 게임을 한다는것 자체가 그당시에는 너무나 새로우니까 정작 그안에 들어있는 게임이 아무것도 새로운게 없고 병맛만 넘치는데도 인기를 끌수밖에. 여러분, 인간이라는게 이렇게 멍청합니다.

그렇게 퐁은 '비디오게임'의 시초가 됐지만 게임역사 전체로 보면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발발이 치와와~ 퐁이 돈을 졸라게졸라게졸라게 버니까 돈냄새를 맡은 사업가들이 뛰어들어서 갑작스럽게 거대한 비디오게임 산업이 생성되었는데 이 산업의 목표는 새로운 퐁(전자핀볼)을 만들어내는게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안믿을테니까 퐁 이후로 70년대에 나온 대표적인 아케이드 전자 게임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퐁의 변형 뽕. 이 아니라 건 파이트 (1975)
건 파이트: 퐁에서 공의 움직임이 너무나 병맛이다 보니 막대기를 사람 그래픽으로 바꿔서 마치 총을 쏘는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공의 움직임은 동일하게 벽에 맞으면 90도로 꺾임) 퐁의 반대로 막대기로 공을 받아내는게 아니라 막대기가 공을 피해야 한다. 장의력 수준...



포탑도 안돌아가는 탱크 (1974)
탱크: 건 파이트보다는 그나마 약간 나은 퐁의 변형. 공을 탄알로 대체하는 대신 막대기가 사방을 제한없이 돌아다닐수 있게 됐다. 필드 중간중간 장애물도 있어서 이동의 단조로움을 줄였다. 그러나 여전히 퐁에서 벗어나지 못한 단조로운 병맛게임.


다들 아시는 벽돌깨기 (1976)
벽돌깨기: 비디오게임의 목표가 전자 핀볼임을 퐁보다 더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핀볼과 똑같이 1인용이고 공을 아래에서 위로 쏘아 올리며 밑으로 공이 빠지면 지는거다. 복잡한 공의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할수 없으니 고정된 플리퍼가 아니라 퐁의 방식으로 공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공의 움직임과 상호작용하는 핀볼의 복잡한 테이블 디자인을 따라할수 없으니 벽돌을 맞춰 없애는걸로 대체한다. 애처롭다...



또다른 핀볼 바라기 씨울프 (1976)
씨울프: 벽돌깨기와 마찬가지로 핀볼을 재현하려는 또다른 어설픈 시도. 상단에 좌우로 배가 지나다니는데 위쪽의 십자표시를 좌우로 이동해서 조준한 다음에 버튼을 누르면 아래쪽에서 어뢰가 일직선으로 쭉 올라가고 배를 맞추면 점수를 얻는다. 어뢰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예측사격이 필요한데 바로 이 예측사격의 메카니즘이 핀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핀볼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뭔 개소리냐 싶을텐데 핀볼에 플리퍼가 달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핀볼은 사실상 슈팅게임이 되었다. 테이블 위의 레일이나 범퍼들중 하나에 불이 들어오면 거기로 공을 보내야 점수를 얻는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인데 그로인해 플리퍼를 아주 정교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아래 그림을 보자.
공이 녹색 화살표쪽으로 플리퍼 상면(검은점이 찍힌면)을 따라 굴러 내려오면 어느 지점에 있을때 버튼을 눌러 플리퍼를 회전시키는가에 따라 공이 나가는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검은색 점과 화살표가 대략적으로 그 위치와 방향을 나타낸다. 숙련된 핀볼 플레이어는 공이 굴러내리는 이 짧은 순간에 타이밍을 맞춰서 테이블 위의 원하는곳으로 공을 쏜다. 핀볼의 재미의 핵심은 바로 이 공을 보내는 기술과 공을 받는 기술에 있다.

씨울프는 핀볼이 공을 보내는 메카니즘을 공 없이 구현하려고 한다. 왜? 공의 움직임을 재현 못하니까. 핀볼에서는 타겟은 멈춰있고 공이 움직일때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데 씨울프는 반대로 공의 방향이 고정되어있고 대신 타겟이 움직여서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것이다. 물론 이래도 핀볼의 무한프레임 무한해상도의 아날로그 움직임에는 비교할수 없이 조잡할 뿐이다. 그러나 이 메카니즘이 그당시 비디오게임에서 핀볼을 재현할수 있는 최대치였고 그후로 쏟아져 나온 슈팅게임의 기본이 된다.



슈팅게임의 원조 스페이스 인베이더 (1978)
스페이스 인베이더: 씨울프가 핀볼의 공을 쏘는 재미는 어떻게 대충 모방했는데 공을 받는 재미는 구현을 못했지. 그래서 드디어 전설의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등장한다. 씨울프는 공을 총알로 대체했다. 그래서 퐁이나 벽돌깨기처럼 공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공을 받는 재미를 얻지? 그냥 따로 타겟이 아래쪽으로 공을 쏴주면 되지. 물론 공을 받는건 너무 퐁이나 벽돌깨기 같으니까 피하는 걸로 살짝 바꿔주고. 와~ 전자핀볼 완성~ 짝짝짝
그냥... 핀볼을... 하세요...



그나마 공의 움직임과 가장 유사했던 달착륙 (1979)
달착륙: 내가 보기엔 그나마 가장 성공적으로 핀볼을 모방한 게임으로 보이는게 이 게임이다. 무려 중력과 관성같은 피직스가 존재한다. 아무 입력이 없으면 중력에 의해 착륙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마치 핀볼 공처럼 가속도를 받으면서 떨어진다. 이걸 로켓엔진 분사를 여러 방향으로 조절하여 정해진 지점에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게임이다.

핀볼에서 공을 받는 기술중에 가장 중요한것이 넛지이다. 넛지란 핀볼 캐비넷 자체를 붙잡고 흔들어서 공이 떨어지는 궤적을 살짝 바꾸는것인데 360도 어느 방향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핀볼의 고수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넛지를 통해 공을 살려낸다. 심지어 플리퍼 아래로 떨어진 공을 다시 위로 올리기도 한다. 달착륙의 엔진분사는 마치 핀볼에서 떨어지는 공을 넛지로 컨트롤하는걸 아주 느린화면으로 재생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아래로 분사해서 위로 상승할땐 플리퍼로 공을 때려서 위로 날리는 느낌도 들고. 아주 느리지만 그 덕분에 핀볼의 움직임을 그나마 코딱지만큼이라도 비슷하게 재현할수 있었던 게임이다.

이런게 비디오게임의 초기 모습인데 여기서 핀볼을 분리시켜 생각할수 있는가? 핀볼을 재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결과가 너무나 초라해서 애잔하기까지 하는구만 뭔 비디오게임의 역사여 역사는. 암만봐도 그냥 핀볼의 역사지. 그것도 그냥 역사가 아니라 퇴보의 역사여. 핀볼이 스페이스 인베이더로 변하는 안습의 역사라고!

70년대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한국에서는 '오락실'로 불리던 아케이드센터를 전세계적으로 유행시킨다. 이제 아케이드게임은 술집이나 카페에 들렸다가 친구 기다리는 시간에 잠깐하는 꼽사리게임이 아니라 아케이드센터라는 그것만을 위한 장소에 찾아가야 하는 주목적으로 변한 것이다. 저는 그것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제 핀볼은 아케이드센터에서 조차도 꼽사리낀 존재에 불과해졌다. 그 자신을 어설프게 베껴서 한없이 너프시킨 스페이스 인베이더에 의해. 팔러 바가텔은 당구에서 태어났지만 당구와 공존했다. 그러나 스페이스 인베이더는 핀볼에서 태어났지만 핀볼을 몰아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단순히 핀볼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퇴행을 신기함으로 감춘.

아케이드 센터가 대유행을 하자 아타리는 TV를 활용해 아케이드 게임을 집에서도!라는 신개념을 들고 가정용 게임기 -콘솔- 을 만들어서 팔아먹기 시작한다. 당연히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게임기도 불티나게 팔리고 거기서 돌아가는 게임도 수없이 만들어지고...

그러나 결국 신기함의 기한도 끝나게 되는데...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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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2

PC게임의 역사 2

본격적인 PC게임의 역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콘솔게임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 그랬냐 발발이 치와와 스치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콘솔게임이 PC게임과 대비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친숙한 콘솔게임을 먼저 설명하면 낯설은 PC게임의 개념을 설명하는데도 더 쉬워지니까. PC게임과 콘솔게임의 역사가 어느시점에서 뗄수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콘솔게임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잠시 머나먼 과거로 돌아가보자. 인류가 국가를 형성하고 잉여자원이 넘침에 따라 발생한 계급사회는 할일없이 놀고먹는 게으르고 퇴폐한 귀족층을 탄생시켰다. 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놀이 게임을 즐기던 어느날 마침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놔씨발~ 한게임 뛰고 나면 힘들어 뒤질거 같은데 공놀이도 테이블 앞에 앉아서 하는 턴제 게임처럼 힘이 안들면 얼마나 좋을까! 어 잠깐만? 그럼 공놀이도 테이블 위에서 하면 되는거 아니여?ㅋㅋㅋㅋ" 이렇게 공놀이 게임이 주는 육체적 피로를 줄여보고자 하는 욕망은 드넓은 필드위에서 온몸을 사용하며 죽도록 뛰어다니는 호방한 게임이 아니라 극도로 한정된 테이블 공간 위에서 축소된 공을 가지고 팔과 손만 깔짝거리며 즐기는 게으른 공놀이 게임인 '당구'를 탄생시켰다.

당구는 구기게임으로서 육체적 피로만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괴상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공의 운동 공간이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테이블 구기게임이라도 탁구는 여전히 3차원 공간 하에서 벌어지는 공놀이 게임임을 보면 이것이 테이블이라는 공간과는 무관한 의도된 특징임을 알수있다. 3차원 공간에서 구의 움직임은 굉장히 컨트롤 하기 힘들다. 공놀이 게임이 그토록 종류가 많고 오래도록 플레이 되어온 이유는 3차원 공간에서 인간의 신체만으로는 영원히 구의 움직임을 정복할수 없기 때문이다. 야구에서는 열번중 네번만 공을 맞춰도 인간중 최고 고수가 되며 축구에서는 매 90분마다 한골만 넣어도 최고수가 된다. 그런데 당구는 이런 구의 복잡한 움직임을 2차원 평면으로 제한함으로써 변수를 줄이고 컨트롤이 상당히 쉬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구에는 공이 한개가 아니라 여러개가 들어간다. 공 한개만으로는 게임이 너무나 시시해져 버리기 때문에.

이 괴상한 '육체적으로 편하고 컨트롤하기 쉬운, 2차원 공놀이 게임'은 비록 전통적인 3차원 공놀이 게임에 비해 컨트롤의 깊이는 줄어들게 되었지만 신체적,연속적,동적인 공놀이 게임의 코어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워낙 육체적 부담이 적고 공과 공이, 공과 막대기가 부딪치는 타격감의 상쾌함과 매번 달라지는 공의 배치와 공의 움직임을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짧은 간격으로 빠르게 반복되면서 하루종일 해도 질리지 않을만큼 굉장한 중독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할일없고 게으른 자들을 위한 가벼운 공놀이 게임의 결정판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 가벼움덕에 당구는 전통적인 공게임과는 다르게 '휴식'의 역할을 하는게 가능해졌고 그래서 술집이나 카페같은 휴식성 공공장소에 당구대가 비치되어 손님들이 쉬면서도 즐길수 있는 심심풀이 오징어땅콩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왜 당구치는 청소년을 불량청소년으로 보는 부정적 사회 인식이 생겨났는지 알만하지 않는가? 당구는 할일없는 놈팽이들에게 딱 맞는 게임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게으름은 끝이 없는 법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흘러내리고 싶은법. 당구도 힘들어. 너무커. 어려워. 불편해. 귀찮아. 으웨에~. 그래서 테이블 크기를 확 줄이고 공도 하나로 줄이고 테이블 여기저기에 홈을 몇개 파놓고는 각 홈마다 점수를 써놓고 한쪽 끝에서 공을 쳐서 홈에 들어가면 점수를 획득하는데 테이블 위에 핀을 몇개 꽂아놔서 홈에 잘 안들어가도록 간단한 장애물을 설치해놓은 이런 미친것같은 개씹좆병신 당구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게 대략 18세기경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근데 씨발 이것도 귀찮아! 공을 막대기로 쳐야된다니! 어떻게 그런 힘든일을 할수가 있어! 그래서 기계공학의 결정체! 과학문명의 정수! 스프링의 힘을 빌려 공을 치게 된다.(...) 조준조차 필요없고 그냥 스프링달린 손잡이를 쭉 당겼다가 놓으면 공이 탁!하고 나가서 핀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홈에 들어가는 것이다. 컨트롤이라고는 스프링을 얼마나 당길것인가 정도일뿐. 으아 흘러내리다 못해 이제는 아주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갈 기세다. 이쯤되면 이걸 당구의 일종으로 취급하는것 마저 당구에게 모욕이 될것같다. 그런데 세살짜리도 흥미를 잃을것같은 이 개병신 게임이 놀랍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_-;

개병맛 자동당구 게임 팔러 바가텔(1870)

이게 바로 1870년에 몬태규 레드그레이브라는 영국인이 만들었다는 개씹좆병신 자동당구인 '팔러 바가텔'이라는 물건이다. 아래쪽에 찔끔 나와있는 플런저라고 불리는 조그만 손잡이 안쪽에는 스프링이 달려있어서 저걸 쭉 당겼다가 놓으면 저 안에 있는 공을 탁 쳐서 공이 레일을 따라 위로 사출되는데 테이블이 경사져있기 때문에 공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슬슬 굴러 내려오면서 핀에 이리저리 부딪치다가 동그란 홈중의 하나에 들어가는것이다. '바가텔'이라는건 이전부터 존재하던 당구의 일종인데 볼링과 비슷하게 서있는 막대기를 쓰러트리는 뭐 그런 종류의 테이블 게임이었다고 한다. 바가텔 앞에 '팔러(Parlor)'가 붙었듯이 응접실이나 공공장소등에 비치되어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의 목적으로 단순화된 바가텔이라는 의미로 '팔러 바가텔'로 불렀을 것이다.

이 병신같은 물건은 당구의 특성인 편하고 쉬운 2차원 공놀이라는 개념을 극한까지 몰고간 결과였다. 하지만 그외에 당구의 특성에 뭔가 한가지 더 추가된게 있다는걸 알수있을 것이다. 그렇다?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공을 움직인게 아니라 플런저라는 기계장치의 힘을 빌려 움직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힘이 아니라 기계의 힘으로 에너지가 전달되는 공놀이 게임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이게 대인기를 끈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19세기였다지만 뭔 씨발 원숭이새끼도 아니고 이딴게 재미있을리가? 재미있어서 인기있었던게 아니라 신기해서, 기계를 사용하는 공놀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새로워서 인기있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기계장치 게임은 그 병신성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인기를 얻게되자 마침내 이걸로 돈을 벌어보려는 시도도 생겨나게 된다. 1931년, 드디어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공이 나오는 핀-볼이 등장한 것이다! 30년대 대공황시대에 값싼 놀이기구인 핀볼은 대유행을 해서 미국의 대부분의 술집과 약국에는 이 핀볼머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걸로 돈을 벌기시작한 핀볼 제조사는 어떻게 하면 더 중독성을 극대화시켜 더 많은 돈을 벌수 있을까를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47년에 드디어 그 유명한 고틀리브사의 험티덤티가 나오게 된다.

핀볼의 혁명 험티덤티(1947)

이 게임에는 최초로 플리퍼라고 불리는 소형 회전 라켓이 탑재되어서 흘러내리는 공을 라켓으로 쳐서 다시 상부로 올리는게 가능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좌우로 빨간 막대기 여섯개가 보일텐데 그게 바로 플리퍼다. 캐비넷 좌우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저 플리퍼가 휙 하고 회전하면서 주변에 온 공을 탁 치는것이다. 그러면 공이 강하게 위쪽으로 튕기는데 중간중간 둥글게 튀어나온 범퍼에 맞게 되면 점수가 올라가게 되고 맨 아래쪽으로 공이 떨어지면 게임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으로 인해서 핀볼의 게임 메카니즘이 구멍에 공을 넣는것에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버티는것으로 완전히 변해버렸으며 게임성이 이전의 핀볼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핀볼에서 '핀'은 더이상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핀볼인데 핀이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핀볼을 계속 핀볼이라고 부른다. 왜? 옛날에는 핀이 있었으니까. 이것만 봐도 명칭과 대상의 성질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걸 알수있다. 명칭 그대로의 뜻보다 명칭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일본rpg가 일본산rpg냐? 아니라고 병신들아. pc게임이 pc에서 돌아가는 게임이냐? 아니라고 병신들아. 너같은 새끼들은 핀볼에 핀이 없다고 핀볼이 아니라고 할 놈들이야. 내가 병신이냐? 니들이 병신이지. 근데 왜자꾸 나보고 병신이래.

플리퍼가 달리고 게임방식이 변하면서 핀볼은 미칠듯한 중독성까지 확보하게 된다. 무거운 쇠구슬을 플리퍼로 때리고 범퍼에 충돌시키면서 생기는 타격의 연속적인 흐름은 타격감도 극대화 시켰다. 극도로 편하고 쉬우면서도 상당 수준의 게임성까지 확보하게 되자 핀볼은 아케이드 게임의 대명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원래 아케이드 게임이란 가판대 게임을 뜻한다. 무슨 축제나 놀이공원같은데서 길 양쪽으로 간단한 게임관련 노점상이 쭉 늘어서 있는거 말이다. 대표적으로 사격해서 인형 넘어뜨리는 게임이나 망치로 내리쳐서 파괴력 측정하거나 뭐 그런 게임들 있잖나. 그런데 이런 게임들 대부분이 동전을 넣고 하는거라서 아케이드 게임=동전넣고 하는 게임으로 인식이 되어버린다. Arcade라는 단어는 가판이 늘어선 통로를 뜻하는 단어인데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그냥 동전넣고 하는 게임이라는 전혀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pc게임이 pc에서 돌아가는 게임이면 아케이드 게임은 노점에서 하는 게임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핀볼을 노점에서 하니? 아니거든? 전기도 연결해야 되서 실내에서 해야되거든? 어디 핀볼도 아케이드게임 아니라고 우겨보시지? pc게임은 pc에서 돌아가니까 pc게임이라매? 일본rpg는 일본에서 만들어야 일본rpg라매? 그럼 핀볼도 아케이드 게임 아니자나. 어? 인정? 어? 씨발새끼.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핀볼은 70년대 들어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기계공학을 넘어선 전자공학의 충격이었다.


-께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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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5

PC게임의 역사 1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때 목적중의 하나는 도스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게이머들에게 서양rpg와 일본rpg의 차이점을 이해시키려는 거였다. 근데 댓글로 길게 대화를 나눠보니 현 게이머들은 rpg는 고사하고 pc게임과 콘솔게임의 차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는걸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그냥 게임 전반에 대한 상식 자체가 나같은 예전 게이머들과는 완전히 다른것같다. 게이머라는 사람들이 무슨 게임의 역사가 50년도 안되는 새로운 매체라느니 이런 개소리를 당연한 상식인듯이 막 내뱉을때마다 나혼자 다른 세계에 떨어진것마냥 당황스럽고 컬쳐쇼크가 온다. 기반 전제부터가 다른데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고 할수가 있을까? 그래서 내가 알고있는 게임에 관한 상식을 한번 써보려고 한다. 게다가 이제 곧 VR시대가 시작되려는 시점이니 pc게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수 없기도 하고.

게임. 우선 게임이란 뭘 뜻하는가. 사전을 찾아봤다.

[명사] A game is an activity or sport usually involving skill, knowledge, or chance, in which you follow fixed rules and try to win against an opponent or to solve a puzzle.

정해진 룰을 지켜야 하고 기술을 요하며 승패가 나뉜다면, 생산활동에 관계된 실용적 목적이 없는 모든 행위는 게임이라는 얘기다.

너무 범위가 넓은것 같은가? 의외로 그렇지 않다. 전쟁은 게임인가? 전쟁에는 기술을 요하고 승패가 나뉘지만 정해진 룰따위는 없다. 제네바조약같은것도 있지만 그냥 약속일 뿐이지 그걸 안지킨다고 자동으로 패배가 되는건 아니다. 모의고사는 게임인가? 기술을 요하고 정답과 오답의 승패가 갈리며 정해진 시간안에 풀어야 한다는 룰도 있지만 학력 점검이라는 실용적 목적이 있으므로 게임이 아니다. 낚시는 게임인가? 기술을 요하며 승패도 있지만 정해진 룰은 없으며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얻는 실용적 목적이 있으므로 게임이 아니다. 섹스는 게임인가? 기술을 요하지만 승패도 없고 룰도 없으므로 게임이 아니다.

축구는 게임인가? 룰이 있고 기술을 요하며 승패가 나뉘고 숨넘어갈때까지 해봐도 땀나는것 외에 아무것도 생산되는게 없으므로 게임이 맞다. 직소퍼즐은 게임인가? 그림을 맞춰야 한다는 룰이 있고 완성/포기의 승패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기술을 요하고 힘들게 완성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므로 게임이 맞다. 심시티는 게임인가? 룰이있고 기술을 요하며 도시번성/파산의 승패가 있으며 엄청난 대도시를 만들어봤자 실제 시장이 될수 있는것도 아니니 게임이 맞다. 레고블럭 놀이는 게임인가? 기술을 요하지만 정해진 룰도 없으며 승패가 나뉘지도 않으므로 게임이 아니다. 게리모드는 게임인가? 전자레고일 뿐이니 게임이 아니다. 마인크래프트는 게임인가? 서바이벌 모드는 게임이고 크리에이티브 모드는 게임이 아니다.

이정도면 대충 게임이 뭘 뜻하는가에 대한 감이 잡힐거라고 본다. 그럼 대답해봐라. 게임의 역사가 몇년이냐? 뭐라고 했더라? 게임의 역사가 50년도 안된다고? 영화보다도 새로운 매체라고? 뭐? 비디오게임은 그전의 게임들과는 다르지 않냐고? 그럼 디지탈 촬영한 영화는 아날로그 필름 쓴 영화랑 다른 매체인가보지? 전자책으로 나온 소설은 종이책으로 나온 소설이랑 다른 매체인가보지? 호모 루덴스라는 말이 있듯이 게임의 역사는 최소한 회화나 음악과 비견될 정도로 오래된 것이 분명하다. 최소한의 그림도 못그리는 포유류조차 새끼때는 형제들끼리 게임 비슷하게 사냥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원시인류가 게임을 안했을리가.

원시인류가 어떤 게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류공통으로 가장 유서깊게 전해내려오는 게임들에는 크게 두가지 스타일이 있다. 바로 공놀이와 턴게임이다. 축구, 야구, 배구, 좆구, 기타등등 연속적으로 몸을 써서 공을 가지고 노는 수많은 파생형 공놀이 게임들이 있는 반면에 포커, 고스톱, 장기, 체스, 바둑, 짤짤이, 기타등등 몸은 전혀 안쓰고 머리만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운빨좆망겜인 턴제 게임들이 있다.

이 두가지 게임들은 서로 아주 상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공놀이 게임들은 신체가 전달하는 직접적인 물리적 에너지로 게임이 돌아가는 반면 턴제 게임들은 물리적 에너지가 아닌 추상적 사고력에 의해 돌아간다. 알파고가 돌을 놓는 손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대신 돌을 놔줘도 100퍼센트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게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공놀이 게임에는 생각을 대신 해주는 사람(감독)이 존재할지언정 플레이어의 신체능력을 대신해주는 사람은 존재할수 없다. 또 다른 상반되는 특징은 시간에 관한 것이다. 공놀이 게임들이 실시간으로 끊김없이 연속적으로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반면 턴제 게임들은 단속적으로 결정의 차례가 돌아오며 플레이어의 결정의 순간까지는 게임이 완전히 정지해버린다. 요약하자면 게임이라는 같은 카테고리에 속하면서도 서로 신체적/사고적, 연속적/단속적, 동적/정적으로 완전히 정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에서 이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강조한다. 잘 기억하기 바란다. 신체적/사고적, 연속적/단속적, 동적/정적.

보통 인간의 지능을 생물 진화의 정점에 위치한 고차원적 능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머리를 안쓰고 몸을 쓰는 게임이 몸을 안쓰고 머리를 쓰는 게임보다 더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게임이라는게 된다. 실제로 구기종목에서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은 가만히 앉아서 카드를 뒤집거나 주사위를 굴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포유류 새끼들의 사냥놀이와 유사하다. 게임의 역사에서 턴제 게임보다는 공놀이 게임이 먼저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턴제게임이 실시간을 구현할 기술이 없어서 나온 구식 게임이니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데 실시간 게임이 턴제 게임보다 더 구식이고 원시적이라고 병신들아. 개병신새끼들 좀 뒤져버렸으면.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스타일의 게임들은 별 발전없이 인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다가 격동의 19세기말~20세기초쯤 되서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가 pc게임과 콘솔게임의 진정한 조상이 나타났던 시기였다.


-꼐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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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

껍질인간 잘못읽기 (2부)

RPG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명확하게 하고싶은 것은 내 블로그의 포스팅은 리뷰와 그 외의 글들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원래는 리뷰가 중심이 되는 블로그를 만드려는게 목적이었고 사실 지금도 의도만은 그렇다.-_-; 리뷰는 하드코어(이 단어를 별로 안좋아하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사용한다)PC게이머의 관점에서 가능한한 객관적으로 쓰는것을 목표로 하고있지만 그만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피곤한 일이 되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리뷰 외의 글에서는 필터없이 마음껏 내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편이다. 몇몇 카테고리명이 '헛소리'나 '설레발'처럼 경박스러운것도 글에 대한 책임을 약간이나마 피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리뷰외의 글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 거침없이 표출된다는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따라서 6부작 '3대 RPG는 죽었는가'에서 보여지는 태도가 실제 RPG를 리뷰하는 기준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3대 RPG는 죽었는가'는 CRPG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정리이며 관점이지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의 도그마는 결코 아니다.

진짜다.

'3대RPG는 죽었는가'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은데, 초반에 TRPG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CRPG의 시작이 D&D로부터 출발한것이라는걸 설명하기 위함이지 CRPG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 TRPG의 모방이라거나 무조건 TRPG가 짱!이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위저드리는 D&D의 모방이라기 보다는 PC게임적 재해석인 셈이며 울티마의 역사는 어떻게든 TRPG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였다. TRPG와 최대한 닮으려는 방향이 웨이스트랜드인데 본인은 이 3대 RPG중에 가장 낮은 위치에 두는것이 바로 웨이스트랜드이다. 3대RPG의 특징으로 던전,퀘스트,룰을 들지만 룰은 그야말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꼽사리일뿐 CRPG의 핵심으로는 언제나 던전과 퀘스트를 최우선으로 꼽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만 봐도 던전과 퀘스트는 그 자체로 게임이 되지만 룰은 룰일뿐 그것만으로 게임이 될수는 없다.

CRPG의 던전과 퀘스트도 TRPG의 그것에서 개념만 넘어왔을뿐 구현방식은 굉장히 다른식으로 발전했다. TRPG가 기준이었으면 실시간 진행의 울티마 언더월드를 던전RPG의 이정표로 제시하거나 정해진 순서없이 완전히 오픈된 탐험으로 진행되는 울티마를 퀘스트RPG의 탄생으로 소개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TRPG의 디테일을 가지고 내 CRPG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는것은 번지수가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CRPG가 발전해온 역사속에서 CRPG를 판단할 뿐이다. TRPG의 큰 영향은 그 과정의 일부일 뿐이지 CRPG의 전체나 이상이 아니다. 그래서 CRPG라는 단어조차 별로 탐탁해 하지 않는다. 장르명으로서 RPG보다는 어드벤쳐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도 이미 여러번 했다.

발더스 게이트에 대한 얘기도 CRPG의 발전 선상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축소시킨 게임이 CRPG의 적통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전의 방향성이 급격하게 사라진 상황에 대한 한탄과 원망과 분노의 표출이지 '그 죄로' 발게이가 후진 게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발게이가 드래곤 에이지보다는 더 나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퀘스트를 평가하는 관점은 단일퀘스트의 질보다 각각의 퀘스트들이 모여서 이루는 전체 구조의 얽힘이 얼마나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언제나 전체가 부분보다 중요하다는 철학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드래곤 에이지의 개별 퀘스트가 발게이의 그것보다 뛰어날지는 몰라도 전체 구조에서는 발게이보다도 더 선형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형편없는 퀘스트가 되는 것이다.

RPG에서 비선형 진행을 강조하는것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스토리의 대체 분기가 얼마나 많은가가 중요하다는 얘길 하는게 아니다. 비선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은 바로 플레이어가 전체 진행에서 얼마나 자율적인 판단을 하고 실행할수 있느냐이다. 스토리 분기가 전혀 없더라도 그것을 게임이 나서서 일방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주입하는게 아니라 플레이어 스스로 찾아 나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스토리가 게임의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드래곤 에이지는 자잘한 스토리 분기가 상당히 많지만 전체 흐름에서는 플레이어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지 않고 강제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스토리 분기가 전혀없는 마왕잡는 초단순 스토리의 쌍팔년도 RPG보다도 플레이어가 주체적인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토리가 좋은지 안좋은지, 비선형인지 선형인지 이런건 사실 부차적인 문제이다. 본질은 게임이란 플레이어가 직접 플레이하는것이고 그것이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다른 미디어와 구분짓는 핵심적인 특징이므로 플레이어의 자율적 판단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것이지 게임이 플레이어를 조종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CRPG나 어드벤쳐는 스토리라는 비(非)게임적이고 장기적 특성을 가진 분야에서도 이런걸 시도했기에 이전의 게임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얻은 것이며 전반적인 게임의 관점에서 발전적인 시도라는 것이고 일본RPG를 비롯한 현대RPG들은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새로운 요소조차 없으니 게임적 퇴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근거없이 특정 시기의 맘에 드는 게임들을 기준으로 잡은게 아니라 그 특정 시기의 게임들에서 게임의 개념이 발전은 커녕 오히려 퇴보했으므로 '현재까지는' 그 시기가 기준이 될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후로 그때보다 더 발전된 게임들이 나온다면 기준이 그쪽으로 옮겨가게 되는건 당연하다. 그래서 2000년이 넘어서 나왔던 데이어스 엑스2를 3대 RPG의 틀을 넘어선 4번째 RPG로 꼽았던 것이다. 내가 특정 시기의 게임들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개념의 시도가 다른 게임들에도 널리 퍼지긴 커녕 조롱을 받고 잊혀졌으니 어찌 비관적이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CRPG라는 장르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불과하다. 리뷰를 쓸때도 장르의 몇가지 특징을 마치 수학공식인냥 기계적으로 대입할만큼 내가 단순하고 멍청한 인간은 아니다. 그럴거면 애초에 리뷰를 쓸 이유도 없다. 그냥 공식만 써놓으면 될것이다. 장르란 비슷한 게임들이 쌓여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이지 게임 이전에 장르가 먼저 존재하는게 아니다. 또한 거기에는 언제나 회색지대가 있기 마련이라 정확하고 기계적으로 장르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바보같은 짓이다.

내가 리뷰에서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보면 두가지이다. 깊이와 새로움. 어느 하나라도 만족한다면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게임의 장르가 무엇인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리뷰에서 장르에 대해 언급하는것은 깊이와 새로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면 이전의 시도들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필요한데 이전의 시도가 쌓인것이 장르이기 때문이다. FPS라면 슈팅뿐만이 아니라 공간의 게임적 활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라 이미 그런 시도가 있었으니 그것이 없다면 슈팅만으로도 전에 없는 깊이와 새로움을 가질만큼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게임이 FPS인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게임이 FPS적인 요소가 있다면 FPS의 역사가 이뤄왔던 한계와 비교하는것이고 RPG적인 요소가 있다면 RPG가 해낸것들과 비교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 리뷰에서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많은걸 넣은 심심한 게임보다 한가지가 특출난 게임이 더 평가가 높다. 데이어스 엑스1편이 바로 전자에 해당하는 예이고 데이어스 엑스2편이 후자에 해당하는 예라고 볼수있다. 발더스 게이트도 이전의 RPG들이 이뤄온 역사에 비하면 뭐 하나 새로운 요소가 없는데 깊이도 딸리니 RPG를 대표할수 있는 게임도 아니고 뛰어난 게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깊이와 새로움은 아무나 만들어낼수 있는게 아니다. 깊이를 만들어 내려면 그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이 필요하며 이런것은 한순간에 쌓을수 있는게 아니다. 오랜시간의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해낼수 있다. 새로움은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서 천재성까지 겸비한 아주 예외적인 사람만이 만들어낼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돈을 벌기위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보다 더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임들이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시디롬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80년대~90년대 초반 PC게임들에 향수를 느끼는 이유도 그때 게임들이 깊이와 새로움을 활화산처럼 뿜어냈기 때문이다. 요즘 대자본 게임들은 그때에 비해 깊이도 없고 새로움도 없다. 오로지 진입장벽 낮추기밖에 없다. 그것을 위해 이전의 게임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까지 남김없이 희생하고 있다. 그런데 그당시 PC게임이 폭발적으로 깊이와 새로움을 선보일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콘솔시장에서 금기시하던 진입장벽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접하기 쉬운것, 단순한것, 직관적인것, 감각적인것, 어린아이도 쉽게 플레이 할수 있는것이라는 지배이념을 산산히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리미터를 해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뷰에서 진입장벽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PC게이머에게 진입장벽을 넘는것은 온전히 게이머의 책임이지 개발자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발자에게 진입장벽까지 책임지라는 것은 어느 한도 이상의 새로움과 깊이는 만들어내지 말라는 족쇄나 다름없다. 게임에 별 기대가 없는 일반인이라면 진입장벽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큰 기준이 될지 모르겠지만 '게이머'에게 게임이란 진입장벽을 넘은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게임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러니 진입장벽을 낮추는데 모든것을 집중하는 현대 게임들은 게이머를 위한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내 리뷰는 철저하게 게이머를 위한 것이다.

나는 그당시 게임들이 현대의 그래픽으로 그대로 다시 되살아나는걸 원하는게 아니다. 그당시의 리미터가 해제된 그 '분위기'가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이다. 돈내는 소비자에 맞춰서 게임을 제한하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게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게임을 만들어 내던 개발자들, 그런 개발자에게 더욱더 한계를 밀어붙이라고 강요하고 타협을 인정하지 않던 게이머들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간때우기로 이쯤이면 뭐 나름 괜찮네... 게임회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는 현대의 게이머들의 게임에 대한 미적지근한 기대치를 보고있자면 참담한 심정이 든다. 내가 알던 PC게임은 그런게 아니었다. 잊을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다른 미디어로는 결코 대체될수 없는 강렬한 몰입을 선사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충분한, 한 인간의 뛰어난 창조성이 발휘된 개성적인 '작품'이었다. 나는 게임에 그런 시절이 존재했다는걸 알리고 싶다. 그걸 접하고 현대 게이머들이 게임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길 바란다. 그래서 현재의 게임판이 뭔가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되어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이게 교조주의 인가?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현재를 긍정하고 과거에 대한 역사인식 없이 비판을 거부하는것이 심각한 교조주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게임 커뮤니티 전반에서 현대 게임이 과거에 비해 무조건 뛰어나며 게임은 항상 발전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항상 목격해왔다. 거기에 대고 그게 아니니 예전 게임도 한번 해보고 직접 느끼라고 아무리 얘길해봤자 아무도 내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리뷰를 개인적인 감상에서 벗어나 게임의 역사를 근거로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로 쓰게 될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내 말을 특이한 개인의 개소리로 치부할수 없도록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재미'는 리뷰의 주체가 될수 없다. 왜냐면 내가 재미를 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될수 없는 특이한 개인의 재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나도 게임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게임으로부터 얻는 자신만의 경험과 흥분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폄하는 커녕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게임은 개인적인 체험이다. 미디어의 특성상 어떤 미디어 보다도 개인적이다. 그 개인적인 체험은 아무도 함부로 평가할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누가 거기다 대고 온갖 쌍욕과 비난을 한다고 해도 그것에 흡집을 낼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이 어떤 객관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 리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내 말에 공감해주는것보다 내가 권하는 게임을 한번 해보는게 나에게는 더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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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FPS와 던전RPG의 상관관계

껍질인간 잘못읽기의 나머지 2부를 쓰려다가 거기 달린 댓글을 보니 FPS에서 3D공간의 의미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것 같아 짧게 보충하려고 한다.

여전히 FPS가 던전RPG의 파생이라는데 의구심을 느끼고 '특이한'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직접 그당시 게임을 해보면 명백하게 알수 있는것들이다. 무슨 로마시대를 유적과 사료로 재구성하듯이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한게 아니라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80년대~90년대초반 던전RPG 몇개를 해본후 울펜3D를 해보면 3D공간을 구성하는 철학이 분명하게 같은 선상에 있다는걸 알수있다. 그것도 귀찮은 사람, 혹은 지금 당장 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느정도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시해 보겠다.

FPS의 창시자가 존카맥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존카맥식 FPS는 하프라이프 등장 이전까지 장르의 절대적인 틀이었다. 고로 존카맥의 FPS를 중심으로 던전RPG와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먼저 울펜3D가 슈팅과 던전RPG의 의도적인 조합이었는지 단지 우연에 불과했는지를 알기 위해  존카맥이 어렸을때 어떤 게임을 해왔고 어떤 게임을 좋아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는 울펜3D로 유명해진 개발자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상당히 많은 게임들을 만들었던 개발자였다.

아래 동영상은 그가 최초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게임 Shadowforge와 Wraith이다. 어떤 게임인지 한번 보도록 하자.


-_-;;;

그렇다. 그냥 대놓고 울티마 카피다. 얼핏보면 아예 울티마3편이나 4편으로 착각할만큼 기본포맷이 똑.같.다.
최초로 만든 게임이 이렇다. 여기서 콘솔적인 뭔가는 전혀 발견할수가 없다. 최소한 이사람이 울티마같은 RPG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는걸 알수 있다. 이게 겨우 울펜3D나오기 3년 전인 89년에 만든 게임이었다.

아래 동영상은 존카맥이 다음해인 90년에 만든 Dark Designs: Grelminar's Staff라는 게임이다.


-_-;;;;;;

그렇다? 이번엔 위저드리 카피다? 던전RPG에서 오토맵이 처음 등장한게 대략 89년쯤이니 오토맵까지 달린걸 보면 던전RPG의 최신 유행까지 따라가고 있다? 처음으로 만든 게임들이 CRPG의 양대산맥인 울티마와 위저드리를 카피할 정도면 이사람이 얼마나 RPG를 잘 알고 있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이 던전RPG를 모르고 우연히 울펜3D의 공간을 비슷하게 구성했을까? 말이된다? 안된다?

그러나 존카맥은 PC게임만 좋아한게 아니었다. 울티마와 위저드리를 카피하더니 그후에는 슈퍼마리오를 카피하려는 시도도 한다. 아래가 바로 슈퍼마리오를 PC로 포팅하려다 닌텐도한테 뺀찌먹고 열받아서 만든 Commander Keen이다.


울티마나 위저드리의 영향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수 없는 전형적인 콘솔 플랫포머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정도이다. 당시 PC게임 만드는 사람들중에 이런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RPG만드는 사람이 콘솔 플랫포머를 만든다? 그당시 상식으로는 완전히 넌센스다. 대체로 특정 장르의 게임을 만든다는것은 그 장르에 상당한 경험이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존카맥은 당시로써는 매우 드물게 PC게임과 콘솔게임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개발자였던 것이다.

이쯤되면 그냥 짐작이 가능하지 않나? PC게임과 콘솔게임이 극명하게 갈려있던 시대에서 양쪽에 전부 통달한 인간이 있었다면 뭘 하려고 하겠나? 마이트앤 매직이 울티마와 위저드리를 합쳐서 나온 게임이듯이 던전RPG와 슈팅을 합치지 못할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91년 존카맥은 울펜3D의 전신에 해당하는 Catacomb 3D라는 게임을 만들어낸다. 아래 동영상을 보자.

사실상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것으로 보이며 게임 진행도 동일한것같다. 울펜3D와의 차이점은 그냥 배경컨셉이 다를 뿐인것 같다. 내가 주목하는것은 바로 그 배경컨셉이다. 울펜3D와 똑같은 형식이지만 배경컨셉이 전형적인 던전RPG의 그것이다. 카타콤이란 무엇인가. D&D던전의 클리셰중의 클리셰가 바로 카타콤 아닌가. 웬만한 던전RPG에 던전컨셉으로 카타콤 하나쯤은 반드시 나오게 된다. D&D시나리오에서 제일 처음 가는 던전의 대표격이 카타콤이다. 울펜3D이전에 나온, 실질적인 최초의 FPS게임이 대놓고 카타콤을 컨셉으로 잡았다는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 울펜3D와 던전RPG의 맵구조를 직접적으로 비교해보자. 아래는 위저드리5와 던전마스터의 레벨중 하나의 맵구조이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의 전형적인 던전RPG의 맵구조는 이런 형식이었다. 그냥 그림만 봐서는 알기 힘들고 직접 플레이를 해봐야 어느정도 감이 오겠지만 그래도 맵을 그리면 이런 형태가 나온다는것은 알수있다. 울펜3D의 맵은 어떨까?


이것이 울펜3D의 맵 몇개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것도 직접 플레이 해봐야 제대로 알수 있는것이긴 하지만 구조적으로 던전RPG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던전RPG에 비해 함정과 퍼즐이 간략화 되긴 했지만 둘다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고 레벨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퍼즐 해결이 필수적인 항목이다. 아무리 슈팅 잘해봐야 열쇠 못찾고 열쇠에 맞는 문 못찾으면 절대 깰수없는 게임이 울펜3D이다. 심지어 오토맵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웬만한 던전RPG 싸대기를 후리는 정신없이 꼬인 미로를 헤메다 보면 슈팅실력보다는 머리속으로 맵을 그리는 실력이 훨씬 중요함을 느낄수 있다. 그런데 이게 FPS라는 장르의 효시였다.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한 FPS에 드는 게임이 이런 맵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하프라이프 등장 이전의 후기 FPS의 맵구조는 울펜3D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발전한다.


위는 95년도에 나왔던 Hexen이란 FPS의 맵중 하나이다. 이미 울펜3D의 단순한 격자미로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울펜3D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진짜 던전RPG인 울티마 언더월드의 후속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울펜3D보다 울티마 언더월드의 맵구조를 연상케 한다. FPS가 인기를 얻고 RPG가 마이너 장르가 되면서 오히려 던전 구성의 발전을 RPG가 아닌 FPS가 이끌어가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이 그로부터 5년후, 2000년에 나왔던 정통 던전RPG인 위자드앤 워리어의 맵이다. 구조상으로 95년의 hexen과 큰 차이가 없다. 물론 던전은 구조뿐만 아니라 함정과 퍼즐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함정과 퍼즐이 놓이는 공간이 어떤식으로 구성되는가는 거의 차이점을 발견할수 없다. 이전의 FPS가 시도했던 3D공간상의 실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쪽이 어느쪽을 배꼈다기 보다는 아예 공간을 구성하는 철학 자체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둘다 목적이 던전이었기 때문에 같은 구조로 완결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웹에 돌아다니는 재밌는 그림 하나를 첨부하고자 한다.


3D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1993과 2010이 비슷한지 아니면 1993과 던전RPG가 비슷한지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FPS가 존카맥에 의해 태어났다는것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존카맥식 FPS디자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것에 동의한다면 FPS에서 3D공간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여지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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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6

껍질인간 잘못읽기 (1부)

웹진 인벤의 파워 블로그 목록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접한 한 블로그에서 '껍질인간 바로읽기'라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다른사람의 관점에서 내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항상 궁금했기 때문에 아주 반가운 글이었다. 아쉬운 점은 이런글을 내 블로그에 알려줘야 오해를 해소하고 이해를 돕는 기회를 만들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것이다. 내 관점과 글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그러나 그 비판에 대해 내가 반론할 기회 정도는 줬으면 한다. 대화를 위해 이 블로그를 만든것이지 일방적으로 나혼자 떠들기 위해 만든것이 아니다. 글쓴이는 FPS와 RPG에 대한 내 관점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FPS쪽은 정확하게 분석한 반면 RPG쪽은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너무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먼저, 내가 FPS라는 장르를 길찾기와 슈팅으로 판단한다고 지적한것은 정확한 해독이니 거기에 대해서 따로 할말은 없지만 FPS의 기준이 특정 시기의 게임들에게만 근거한 편협한 시각이라는 비판에 대해 반론하고자 한다.

글쓴이는 FPS를 단순히 '1인칭으로 보면서 공격한다'로 정의하고 있다. 그 근거로 maze war와 spasim이라는 게임을 FPS의 시초로 들고 있으며 이 게임들이 FPS의 시초라는 근거는 위키피디아(...)에 근거하고 있다.

Sigh...

위키피디아가 게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었다면 내가 이 블로그를 열고 열변을 토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것이다. FPS라는 장르의 탄생을 직접 몸으로 겪은 산 증인으로서 왜 FPS가 단순히 '1인칭 슈팅'이 아니라 길찾기가 중요한지 설명해보겠다.

1인칭으로 슈팅을 하는 게임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최초로 FPS라는 명칭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1인칭 슈팅이란 그다지 신기한 요소가 아니었다. 글쓴이가 언급했던 maze war나 spasim같은 게임 외에 오리사냥 같은 건슈팅 게임도 1인칭으로 슈팅하는 게임이며 울펜3d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스텔라7같은 게임이 더 정교한 3D 1인칭 슈팅을 제공하고 있었고 윙커맨더는 더 커다란 상업적 성과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1인칭 슈팅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오리사냥
조준보정같은거 없고 예측사격까지 해야하는 스텔라7
울펜3D 이전에도 이미 윙커맨더는 1인칭 슈팅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이런 게임들을 새로운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따로 장르명을 부여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1인칭 슈팅은 그냥 평범한 슈팅게임으로 여겨졌다. FPS라는 장르명에서 그 장르의 의미를 찾는것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시도라는 것이다. (애초에 FPS라는 이름을 붙인놈이 죽일놈이다.)

본인부터도 이미 울펜3D 등장 이전부터 1인칭슈팅에 아주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펜3D를 처음 접했을때는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동시기의 울티마 언더월드가 더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그당시 게임을 하던, 1인칭슈팅에 이미 익숙해있던 PC게이머들 모두가 울펜3D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최초로 게임을 하면서 멀미-_-;를 느끼기 시작했고 울렁거리는 구토감을 참아가면서도 마치 무엇에 홀린냥 울펜3D를 놓지 못했다. 거기에는 이전의 1인칭 슈팅게임과는 확연히 다른, 육체의 고통-_-;을 참아가면서까지 놓을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이 있었고 모두가 이것을 이전의 슈팅게임들과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FPS라는 장르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 새로운 즐거움이 뭐였냐고? 바로 10년이 넘게 PC게임을 지배해오던 '가상의 3D구조물 내부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의 실현이었다. (스텔라7이나 윙커맨더같은 게임의 경우는 3D공간임에도 어디로 이동하든 변화가 없는 사방이 열리고 텅빈 무한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상공간을 헤메고 돌아다닌다는 강렬한 존재감을 느낄수는 없었다.) 애초에 왜 던전RPG들은 1인칭이었을까? 3인칭으로도 얼마든지 던전을 재미있게 구현할수 있음에도 굳이 1인칭을 사용한 이유는 바로 현장감, 실제 내가 던전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다. 당시 기술적으로 거대한 3D구조물을 구현할수 없었기 때문에 사각 격자로 딱딱 끊어지는 타일 형식을 사용할수 밖에 없었던 것일뿐 실제로 움직이듯이 던전안에서의 360도 자유로운 회전과 부드러운 이동은 제작자와 게이머 모두의 꿈이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실제로 구현됐을때 어떤 느낌인지를 알수는 없었다.

울펜3D와 울티마 언더월드를 통해 최초로 그것이 구현되었을때 그 느낌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냥 던전안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너무 신기해서 빠져나올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트릭스안에 들어간 느낌이라고 할만했다. 거기에 비하면 그전까지 흔해빠졌던 1인칭 슈팅따위는 별로 중요한 요소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요즘게이머들은 3D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게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고 그것이 실현됐을때 어떤 충격이었는지를 감히 상상할수조차 없다. 그러니 FPS를 단순히 1인칭 슈팅게임으로 보는게 당연하다. 현재의 인식으로 과거를 판단해버린 것이다. 과거는 과거의 인식으로 판단해야 제대로 볼수있는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FPS를 던전RPG의 파생이라고 보는것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온것이다. 그당시까지 3D공간이 주가 되고 그 안을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문제해결을 하는데 가장 특화된 장르가 던전RPG였기 때문이다. 울펜3D와 울티마 언더월드는 다른 장르이면서도 같은 욕망에 의해 나온 게임이었다. 이것을 무시해서는 왜 FPS라는 장르가 이전의 1인칭 슈팅게임과 다른 장르인지 이해하지 못하며 굳이 FPS를 슈팅게임에서 구분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FPS는 단지 1인칭 슈팅이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3D 공간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슈팅만큼 3D공간도 중요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RTS가 단순히 전략게임이 아니라 '실시간'과 융합했기 때문에 RTS이듯이 FPS도 단순히 1인칭 슈팅게임이 아니라 3D공간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에 FPS인것이다. 괜히 FPS가 3D기술을 선도했던게 아니다.

그런데 하프라이프는 3D공간의 구조를 3차원에서 1차원으로 단순화시킨 대신 퍼즐로 보충했지만 헤일로 같은 게임에서는 더이상 공간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순수한 1인칭 슈팅으로 돌아가버렸고 이는 FPS의 등장 이전으로의 퇴보를 의미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태초에 슈팅이 있었고 거기서 1인칭 슈팅이 태어났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거기에 가상의 실제적인 3D공간을 덧붙인 FPS가 태어났다. 다시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하프라이프가 3D공간의 의미를 지워버렸고 원래의 단순한 1인칭 슈팅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사실상 FPS라는 장르는 죽어버린것이다. 그러나 FPS라는 명칭만은 아직도 남아서 사실을 증언하는 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욕을 먹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쓴이가 내가 말하는 FPS와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FPS는 다른 장르일수 있다고 한 얘기는 아주 정확하게 핵심을 짚은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왜 편협한 인간이 되는지는 이해할수가 없다. 현재 사람들은 1인칭 슈팅게임은 알지만 FPS가 뭔지는 모른다. 나는 그 두가지를 전부 알고 있다. 과연 전자가 내세우는 기준이 편협하겠는가 아니면 후자가 내세우는 기준이 편협하겠는가. 현재의 인식이나 다수의 인식이 더 정확한 인식은 아니다.

이제 서론은 끝내고 본격적으로 RPG에 대해서 반론을 해야하는데 힘이 딸려서 더이상 쓰기가 힘들다.ㅠㅠ RPG에 대해서는 다음 이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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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7

PC게임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증거

내가 씨봘 웬만해서는 흥분을 안할려고 노력하는데 어떤 개병신찐따새끼 한마리가 PC게임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면서 PC게임의 장르가 내가 혼자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아무 근거없는 뇌내망상이라며 증거가 있으면 증거를 대라는 PC게임에 대한 천인공노할 신성모독을 범하기에 상대하고 싶지 않음에도 PC게임에 대해 더러운 오명을 씌우는것을 참을수 없어 이를 증명할 만한 간단한 사료(?)를 제출하게 되었다. 씨봘씨봘.

다음은 Computer Gaming World (CGW)의 1990년 12월호의 인기게임 순위표이다.
참고로 CGW는 81년에 창간한 최초의 PC게임 잡지이자 9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PC게임 잡지로 명성이 드높았던 PC게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단일 잡지였다.
누르면 커짐. 앙~

인기순위가 1위부터 55위까지 나와있는데 조사방식은 독자들의 엽서를 통한 투표형식이다. 인터넷이 없었다 그말이오!

먼저 왼쪽의 장르구분을 보자. 6개로 전 게임의 장르를 구분하고 있는데 ST가 전략(strategy), SI가 시뮬레이션, AD가 어드벤쳐, RP가 롤플레잉 어드벤쳐, WG가 워게임, AC가 액션이다. 내가 항상 말해왔듯이 90년 12월에도 RPG라는 장르는 없었다. 롤-플레잉'어드벤쳐'라고 불리는 장르가 있었을 뿐이다. 설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드벤쳐와 롤플레잉어드벤쳐의 구분을 캐릭터의 능력치 성장 유무로 판단하고 있다. 액션게임의 정의도 읽어보면 재미있는데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액션/아케이드 게임을 말하는게 아니고 그냥 실시간 조작이 가능하면 다 이 범주에 넣는걸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봐도 PC게임의 기본이 비 실시간임을 알수 있다. 실시간게임이 얼마나 드물었으면 실시간만 되도 다 액션게임이래! 씨봘!

이제 본격적으로 순위표를 보자. 먼저 가장 중요한 10위까지!
1위에 Their Finest Hour라는 루카스아츠(이당시에는 루카스필름)의 2차대전 비행시뮬 게임이 올라와있다. 장르 구분이 AC,SI로 되어 있는데 이 게임을 직접 해보면 알겠지만 전혀 액션이나 아케이드 게임이 아니라 순수한 시뮬레이션임을 알수있다. 픽션적 요소 없이 그당시 기술수준에서 최대한 사실적으로 만든 게임이다. 게임박스 정면에 An historically accurate, action-packed air combat simulation 이라고 당당히 써있다. 한번 게임화면을 보시라.
편대비행도 가능한 본격 시뮬레이션이여!
2위는 레일로드 타이쿤(설마 이거 모름?), 3위는 울티마6(설명이 필요한가?), 4위는 하푼(레알 하드코어 워게임이시다), 5위는 심시티, 6위는 M-1탱크 플래툰이라는 시뮬레이션, 7위는 메크워리어(거대로봇 시뮬레이션의 원조이심), 8위는 파퓰러스(블랙앤 화이트의 원조급), 9위는 히어로즈 퀘스트라는 어드벤쳐, 10위는 레드스톰라이징이라는 잠수함 시뮬레이션이다.

최고 인기게임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가 어드벤쳐/RPG/워게임/시뮬레이션에 해당하는 장르고 콘솔에서 발전했던 액션게임, 슈팅게임, 플랫포밍은 단 한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11위부터 55위까지를 볼까?

28위 LHX Attack Chopper, 34위 Airborne Ranger, 47위 Ballistyx와 Zany Golf 단 4개의 게임만이 AC로 구분되어 있다.

28위의 LHX어택초퍼는 헬기 시뮬레이션임에도 단지 아케이드성이 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SI라벨을 달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당시 콘솔기준이라면 완전 시뮬레이션에 속할 게임이며 헬기시뮬의 원조로 불리는 게임인데도 말이다.
내가 시뮬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소리야!
나머지 세 게임은 들어본적도 없고 뭔 게임인지 잘 모르겠으니 그냥 액션게임이라고 쳐주자.

그래서 결론.
90년 12월에 PC쪽에서 최고 인기게임 1위부터 55위까지 중에 어드벤쳐/RPG/워게임/시뮬레이션에 해당하지 않는 게임은 34위에 하나 47위에 둘, 합계 3개 되겠다.

한달에 1위부터 55위면 그시기에 접할수 있는 거의 모든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씨봐아아아아아아아아알 어드벤쳐/RPG/워게임/시뮬레이션(헥헥)에 해당 안하는 게임이 하위권에 딸랑 3개 뿐이라고오오오오오오옹! 이름도 들어본적 없고 아무도 기억못하는 3개 빼고는 전부

어드벤쳐!!!!

RPG!!!!!!!

워게임!!!!!!!!!!!!!!!!

시뮬레이션!!!!!!!!!!!!!!!!!!!!!!!!!!!!!

으아아앙아아아아앙!!!!!!!!!!!!!!!!!!!!!!!!!!!!!!!

이래도 PC게임이 콘솔이랑 구분이 안된다고라고라고라고라고라고라????????????????
인기순위만 이런게 아니라 그냥 기사 전체 내용에 저 4가지 장르 빼고는 거의 나오지도 않어!!!!!!!!!!!
뭔 씨봘 허접한 액션게임 따위에 지면을 할애하는 일은 감히 상상할수도 없었써!!!!!!!!!!!!!!!!





아오.... 성질이 뻗쳐서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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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인벤 인터뷰 원본

http://www.inven.co.kr/webzine/news/?news=53936

아래는 제가 인벤쪽에 써서 보낸 무수정 원본입니다. 어조가 약간 다른 부분도 있고 해서 남겨놓겠습니다.






 
첫 질문으로 기사 제목 좀 세게 가도 되나. 콜오브 듀티 빵점이라던가.
 
제목은 마음대로 붙이시라. 그러나 모던워페어 리뷰의 별0개의 의미는 빵점이라기 보다는 '점수없음'의 의미에 가깝다.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게임'이 아니라 '마치 게임을 하는듯한 느낌을 주는 영상체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닌것에 게임으로서의 점수를 줄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멀티플레이는 배제한 싱글캠페인에 대한 평가다. 내 블로그에서는 멀티플레이는 다루지 않는다.


현직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 중 당신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름까지는 밝히지 않아도 좋다. 나이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왜 게임업계 종사자가 날 궁금해 하는지 궁금하다. 극히 평범한 PC게이머 중 1ㅅ에 불과할 뿐이다. 단지 PC게이머가 멸종위기일 뿐이지.(울음) 나이는 30대, 하는일은 게임관련은 아니다. 이 이상 개인 정보는 공개하고 싶지 않다. PC게임이란게 존재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요즘 게이머들 중에는 나같은 PC게이머라는 낮선 존재를 자신들의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불편한 불순물이나 삭제해야할 에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블로그의 댓글란을 보라.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날 욕보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이 매의눈으로 24시 대기중이다. 익명성은 하고싶은 말을 하기위한 내 최후의 방패이다. 그외에 사회적 편견없이 다같이 평등하게 대화하자는 순기능적 의도도 있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게임을 보는 시각이 가장 독특하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게, 'RPG는 발더스 게이트에 의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였나. 블로그에서는 굉장한 장문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압축하여 의견을 말해줄 수 있나.

거기다 쓴게 최대한 압축한 내용이라 더이상 압축하면 내용전달이 제대로 되기 힘들다. 오해가 불가피하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PC의 운영체제가 DOS에서 윈도우로 바뀌면서 사용층의 특성이 갑작스럽게 변했고 그동안 이어져오던 PC게이머라는 집단이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때 기존의 PC게임에 경험이 없던 새로 유입된 사용층을 노려 원래의 CRPG의 발전 방향이 아닌 콘솔RPG(과거 PC게이머들 사이에서 일본RPG라고 부르던)적 방향을 택한 발더스게이트라는 RPG가 나타났는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새로 유입된 게이머들에게 그것이 전통적인 CRPG라고 오해를 받게 되었다. 이후 발더스게이트가 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원래의 CRPG는 쇠퇴하였고 CRPG의 개념까지 잊혀졌다는 얘기다. 플랫폼의 변화와 세대의 단절, 오해, 잊혀진 역사, 뭐 그런 얘기다.(울음)
 

블로그 내 리뷰 목록이 특히 눈에 띈다. 바이오쇼크와 듀크뉴켐포에버가 동점이고, 콜오브듀티4 모던워페어는 0점이더라. 게임을 볼 때 가장 큰 기준으로 꼽는 게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게임플레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의 룰 안에서 얼마나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수 있는지, 게임이 거기에 얼마나 잘 반응할수 있는지가 우선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최후에는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비전을 심어주는 게임을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은 플레이어의 것이되, 시작과 끝은 제작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플레이어는 제작자가 마련해놓은 먹음직스런 미끼를 물면서 게임을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간섭없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놀다가 끝에가서는 그게다 제작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난것임을 깨닫는것, 그래서 플레이어가 제작자의 게임세계에 의해 재교육 되어 게임을 시작하기 전과는 약간 다른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 그런것이 싱글플레이 게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소문으로만 들을 땐 RPG 관련 전문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블로그를 자세히 보니, 이 외 장르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좋아하는 장르가 뭔가? 그 이유는?
 
PC게임의 모든 장르를 좋아한다. 워게임, 어드벤쳐, RPG, 시뮬레이션 이 4가지 장르를 PC게임이 창조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실시간 보다는 주로 턴제 게임을 좋아하고 실시간일 경우는 매우 사실적인 게임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간상 모든 장르의 게임을 즐길수가 없어서 주로 RPG와 시뮬레이션으로 범위를 좁혔다. RPG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위의 답변 내용을 구현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RPG를 하다보니 게임에 대해 그런 관념을 가지게 된것같다. 그러니까 RPG를 좋아하는 이유는 먼저 RPG를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처음 RPG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시뮬레이션적 특성 때문이었다. 어렸을때부터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에 강한 매력을 느껴서 PC쪽의 비행시뮬에 빠져들었고 PC게임을 하다보니 우연히 울티마를 접하게 됐는데 울티마는 마치 세계 전체를 가상으로 구현한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빠져들었다가 시뮬레이션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걸 알게됐다. FPS는 던전RPG의 파생장르나 시뮬레이션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하프라이프식 레일슈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작성한 포스트를 보면 인벤에 올리기엔 다소 과격한 표현이 엿보이나 엄청 재미있다. 글을 따로 배웠나?
 
초중고를 제외하고는 글쓰는 수업같은건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다. 사실 글쓰기를 굉장히 싫어한다. 원하지 않는 뭔가를 억지로 써야할 상황이면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고문이 없다. 글을 워낙에 못써서 스스로 쓰길 원하는 글도 막상 쓰려고 하면 고통스럽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유도 보다보다 못해서 쪽팔림 감수하고 억지로 쓰는것이다. 사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유도 쪽팔려서인것 같다. 이런 글을 누군가 좀 써줬으면 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PC게임 다 망할때까지 아무도 안쓰더라.(울음)

 

 
자신이 꼽는 최고의 게임은 무엇인가?

게임이란게 각자 장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최고의 게임으로 한개를 꼽기는 힘들다. 뭔가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때문에 다른 뭔가를 포기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조건을 한정시킬때만 최고의 게임을 뽑을수 있을것이다. 내 개인적 이상향을 조건으로 최고의 게임을 하나 꼽자면 어드벤쳐 게임 '리븐'을 꼽겠다. 게임이 예술이 된다면 아마 이런 형식이 아닐까 싶다. 게임이라는 미디어에 아무런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없을정도로 엄청나게 간단한 조작과 명확한 룰을 가졌으면서도 높은 수준의 게이머도 강하게 몰입할 만큼 깊이있는 게임플레이와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질적으로 최상급이면서도 양적으로도 어디하나 부족하거나 넘치는 부분 없이 완전하게 한덩어리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플레이어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플레이 하지만 엔딩에 가서는 제작자의 의도에 의해 강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 반대로 최악의 게임은?

디아블로2. 내 인생이 끝나기 전에 이것보다 더 무의미하고 지루한 게임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식의 단순 반복에 스트레스가 낮은 게임을 무척 싫어한다. 수단이 되어야할 아이템이 목적이 되는 게임플레이도 싫고.



GOTY 받은 게임 치고 제대로 된 게임이 없다고 언급했다. GOTY의 기준에서 무엇이 문제라 생각하는지.

GOTY는 원래 PC게임 잡지에서 뽑던거였다. 80년대부터 있었다. 그 취지는 1년동안 나온 게임중에서 인기나 판매량을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가장 뛰어난 게임을 뽑자는거였다. 영화로 치자면 칸이나 베니스 시상식이라고 할까. 대중과 상관없이 철저하게 소수의 게임광들에 의해 뽑혔다. 그래서 좋은게임이 상업적으로 실패해도 제대로 평가를 받거나 소개되는등 순기능이 있었다. 이후 웹진체제로 바뀌면서 상당히 대중적인 게임들이 뽑히긴 했지만 이는 대중성을 의식한게 아니라 뽑는 사람들의 자질이 그전보다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98년엔 겨우10만장 팔렸다는 시스템쇼크2가 게임스팟에서 GOTY로 뽑히기도 하는등 나름 노력하는 모습은 보였다. 영화로 치면 아카데미 시상식쯤? 근데 엑박 출현 이후로 PC게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부터는 그런 순수성이 완전히 사라진것 같다. 전문가가 뽑는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지나가던 콘솔게이머A가 뽑았다는 느낌밖에 없다. GOTY 발표하기 전부터 어떤 게임이 받을지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다. 그냥 제일 잘팔리거나 아주 유명한 게임 아니면 GOTY 후보조차 오르지 못한다. GOTY의 의미가 완전히 변질된 것이다. 게임언론이 돈중심으로 돌아가는게 문제고 리뷰어의 자질이 그냥 지나가던 콘솔게이머A수준이라는것도 문제다.(울음)


웨이스트랜드2에 대단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온라인 게이머들은 잘 모를 만한 게임인데, 간단한 소개를 부탁해도 되나.

발더스게이트가 나오기 이전의 전통적인 CRPG의 명맥을 잇기위한 게임이다. 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CRPG를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액션이 아니라 표현이 자유로운 텍스트와 깊은 사고를 다시 RPG의 중심으로 놓는 시도를 하려는 게임이다. 발더스게이트처럼 파티를 조종하고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졌지만 게임의 스토리는 비선형적이고 주변환경이나 오브젝트와의 인터렉션을 각종 비전투 스킬을 통해 구현하며 전투보다 퀘스트 해결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 될것이다.
웨이스트랜드2는 CRPG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 외에도 킥스타터라는 크라우드펀딩 모델의 성패를 가늠할 매우 중요한 게임이다. PC게임 부활의 첨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단추가 잘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관심이 많다.


 

박스 아트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게임 박스 중 최고로 꼽는 디자인이 있나? 블로그에선 웨이스트랜드1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외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이유는?

크게 관심은 없다. 그냥 블로그에 쓸게 없다보니 가지고 있는 패키지나 찍어서 올렸는데 뭐 할말도 없고 해서 박스아트 품평을 하는것 뿐이다. 하지만 좋은 게임이 박스아트도 좋으면 더 즐거운것은 틀림없다. 디지탈 배포 시대라 이젠 더이상 느낄수도 없는 즐거움 아닌가.

박스아트중 최고의 디자인으로 꼽는건 울티마7편이다. 이게 디자인이 어떠냐면 그냥 검은색 박스다. 앞에 울티마7 써있고 그걸로 끝이다. 아무 그림도 없다. 울티마7 이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지. 요즘 이정도 자신감있는 게임 있나? 그당시 울티마였기에 가능한 박스 아트였다. 게다가 이게 그냥 호기가 아니라 사실은 게임에 등장하는 블랙게이트의 모습을 그대로 패키지 디자인으로 재현한 2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게임의 부제도 블랙게이트이니 완벽한 디자인이 아니겠나. 이런것만 봐도 요즘 게임들이 얼마나 상업적이고 작품성에는 관심도 없는지 알수있다.(울음)


 

'그나마' 대중성 가진 게임 중 추천할 만한 게임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최근에 나온 게임중에 레전드 오브 그림락이라는 던전RPG가 있다. 과거의 던전RPG 형식중 하나를 그대로 모방한 게임인데 PC게임이 어떤것인가 약간 감을 잡기에 좋을것이다. 난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게임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왜냐면 그 형식으로는 던전마스터에서 벗어날수도, 뛰어넘을수도 없기 때문에.-_-;
나온지 좀 됐지만 폴아웃 뉴베가스도 추천한다. 요즘 RPG에서는 보기드문 비선형 플롯을 가진 게임이다. 게임의 리드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Josh Sawyer's mod는 반드시 깔고 할것.
 

혹시 자신과 비슷한 게임 시각을 가진 블로거를 본 적 있나?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국내엔 없는것 같다. 있었으면 내가 이런거 쓰고있을리가 없다. 외국에는 있을것 같지만 찾아본적은 없다. 내 블로그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제로 펑츄에이션이 나랑 비슷한거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내가 볼땐 별로 비슷하다고 못느끼겠다. 방향성에서 약간 비슷한게 좀 있는데 그건 개인간의 유사성이라기 보다는 PC게이머의 유사성이라고 생각한다. 얏찌가 PC게이머적인 특성을 가진것만은 사실이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옛날부터 무슨 인터뷰같은거 보면 맨날 대답 뒤에 (웃음) <-이런거 붙어있는게 매우 신경쓰이고 싫었다. (하하)도 아니고 (웃음)이라니. 거기에 복수할수 있는 인터뷰 기회를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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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아오 이 병신같은 폴아웃 빠돌이 색히들...

웨이스트랜드2의 게임플레이 비디오가 공개된 이후, 대화 시스템이 폴아웃같은 선택지 형식이 아니라 키워드 형식인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결국 개발자들은 곧 대화 시스템을 좀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며 그 이후 다시 피드백을 받아 시스템을 수정할수도 있다는 답변을 내놓게 되었다.

...

휴...

Sigh......

내가 결국 이 병신같은 폴아웃 빠돌이새끼들이 일을 낼줄 알았다. 브라이언 파고가 팬들의 피드백을 통해 만든다고 할때부터 이런일이 일어날까봐 무서웠었다. 도데체 이새끼들이 발게이 빠돌이들이랑 다른점이 뭔가. RPG라곤 폴아웃밖에 모르고 다른 게임은 해본것도 없고 해볼 생각도 없고 그저 원하는것이라고는 그래픽이 좋아진 폴아웃밖에 없는, 평생 폴아웃만 하다가 뒤지고 싶은 인간들이 다른 게임들에 감놔라 배놔라 할 자격이 있나? 키워드 시스템이라고는 접해본게 겨우 모로윈드 뿐이고 그것조차도 폴아웃이랑 다르다고 30분만에 때려친 병신같은 인간들이 키워드 시스템에 대해 뭘 안다고 키오스크니 뭐니 떠들어 댈때마다 폴아웃 빠돌이들에 대한 혐오감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이들의 의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웨이스트랜드2 제작진들에게도 강한 실망감이 든다. 힘들게 킥스타터를 한 이유는 자기들이 만들고 싶고 자기들이 가장 잘 만들수 있는 게임을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들의 간섭을 피해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퍼블리셔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게임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게 게임제작을 방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는 저 병신같은 폴아웃 빠돌이들에게 휘둘려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게임마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만들 생각인가? 왜 스스로를 불리한 상황으로 몰고가는가.

비행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회사중에 이글 다이나믹스라는 회사가 있다. DCS시리즈라고 최고의 비행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내는 회사인데 포럼에 가보면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게 너무 불편하다, 왜 이런 장비가 없냐, 왜 다이나믹 캠페인이 없냐, 이런거 해달라, 저런거 해달라 불만이 끝도 없는데 제작진의 답변은 한결같고 간결하다. '그거는 사실이 아니다' 이 한마디로 모든 불만들을 일축해버린다.

그들은 오직 '현실의 모방'이라는 자신들의 기준과 목적을 두고 게임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의 게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절대로 방향을 수정하지 않는다. 완전히 일방적이다. 하려면 하고 싫으면 꺼지라는 식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만을 끝없이 내뱉으면서도 계속 이글 다이나믹스의 게임을 구입한다. 그 이유는 아무리 소비자를 푸대접하더라도 그들보다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 현대전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낼 실력을 가진 회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실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자신들만의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의 게임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야말로 극소수중의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부분은 게임을 완전히 소화하기는 커녕 조작만으로도 힘들어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들 게임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준에 맞춰서 게임을 약간 소프트하게 타협하면 어떻게 될까? 잠깐동안은 그전보다 더 많이 팔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방향으로는 제작 난이도도 낮아진 만큼 경쟁자를 끌어들이게 되고 운이 좋아 시장이 커지면 요구사항의 평균치는 계속해서 내려갈 것이다. 점점 소프트하게 만드는 경쟁에 불이 붙고 결국에 가서는 '사실성'이라는 비행 시뮬레이션의 본질과는 한참 멀어진 수준에서 자본력 있는 회사가 독점하는 장르가 되고 만다. 이글 다이나믹스같은 회사는 게임제작을 접든지 아니면 그저 하청이나 받아먹으면서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게임과는 한참 동떨어진 게임을 만들거나 둘중의 하나를 택할수 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마 전보다 더 많은 소비자들이 즐거움을 얻을수는 있을 것이다.(그 즐거움의 강도는 둘째치고) 그러나 '비행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장르를 지키고 발전시킬수 있는 사람들은 장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들이지 소비자 비위맞춰주고 돈버는 사업가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일이 정확히 RPG에서 일어나 왔다. 그래서 가장 RPG를 잘 알고 잘 만드는 사람들은 게임을 만들길 포기하거나 대기업 하청하면서 재능을 낭비해야했고 RPG에는 별 열정도 없는, 돈좀 벌었다고 게임따위ㅋㅋ 하며 맥주회사나 차릴 사람들이 장르의 마이스터로 대접받는 개같은 일이 벌어져왔던 것이다. 이런 개같은 상황을 벗어나보자고, 처음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고 시작한게 킥스타터 아니었나?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또 같은 상황을 만들려고 하는것인가? 

소비자는 창작자와 동급이 아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상상할수 없고 그저 자기 경험의 한계 내에서만 머무는 겁쟁이들에 불과하다. 새로운 뭔가를 눈앞에 가져다 보여주기 전까지는 새로운 뭔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위저드리나 울티마, 웨이스트랜드 같은 명작 게임들이 소비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들이었나? 소비자는 그런 게임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게 존재할수 있다는걸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그 시대를 다시 되돌리고자 한다면 그들의 요구에 맞춰줄것이 아니라 작품의 질로써 그들의 무책임한 입을 닫도록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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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8

게이머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

이쯤에서 아무래도 영화같은 게임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번쯤 언급을 해야할것 같다. 좀더 일찍 했어야 할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로 이걸 쓰고싶지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이런걸 써야한다는 사실 자체가 날 우울하게 만들어서 지금껏 피해왔지만 조금씩 방문자가 많아지면서 이제는 피할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것 같다.

먼저 좀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으로부터 20년전, 그러니까 90년대 초쯤, 이름부터 뭔가 미끈한 느낌의 씨디-롬 이라는 새로운 대용량 저장매체가 게임에 사용되면서 PC게임계는 일대 격변을 맞이한다. 한장에 1메가바이트가 겨우 넘는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한장에 700메가바이트, 무려 이전의 700배에 달하는 용량을 사용할수 있게 된것이다. 게임 역사상 이런 엄청난 용량의 변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CD롬에서 DVD로는 겨우 10배정도의 증가였고 DVD에서 블루레이는 그것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이 엄청난 용량증가 덕분에 갑자기 그래픽에 대한 제한이 확 풀리게 된다. 지금시점에서 보면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원시적인 상태였지만 그당시에는 그래픽의 '질'은 고사하고 '양' 조차도 지극히 제한될수 밖에 없던 시절이라 그것만으로도 폭발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실시간 그래픽 기술은 그대로였고 하드웨어의 처리속도도 그대로 였지만 용량을 이용하여 그래픽을 좋아지게 할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다들 알다시피 바로 프리렌더링 동영상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게임에서 화상이 움직이는 '동영상'이라는건 용량의 제한때문에 사치나 다름이 없었다. 최대한 데이타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그저 정지화상에 약간씩 에니메이션을 더한 수준이 최선이었다. 거기에 음성은 커녕 싸구려 전자음같은 미디음악만 나와도 감지덕지였다. 그정도만 해도 사람들은 그래픽과 사운드가 끝내준다며 질질싸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서서히 발전하는 중간과정이 전혀 없이, 말그대로 청천벽력처럼 영화같은 동영상과 녹음된 음성이 몇초도 아니고 몇십분씩 줄줄 흘러나왔으니 그때 사람들이 느꼈을 충격이 어땠겠는가. 아마 사진만 보던 사람들이 최초로 영화를 봤을때의 충격과 비슷했을 것이다. "으아니 세상에 이럴수가! 게임이 마치 영화같아!" 라며 다들 신기해했다. 그때가 바로 '영화같은 게임'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엔 영화와 게임은 완전히 다른 매체였고 아무도 그 두개가 섞일수 있다고 상상할수 없었다.

나같은 PC게이머들도 처음엔 열광했다. 보기만 해도 빠져드는 화려한 그래픽과 텍스트가 아닌 사람의 실제 음성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프리렌더 동영상 특유의 한계가 엿보이긴 했지만 시간과 기술이 해결해줄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들 희망에 차서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지 않았다. 프리렌더 동영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커녕 오히려 그 한계를 더욱 강화하는 시도만 늘어갔다.

프리렌더 동영상의 한계란 미리 만들어놓은 움직임과 시점 안에서만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이동만 따져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수 있는게 아니라 이미 렌더링 해놓은 특정 방향으로만 이동해야 했다. 거기에 프리렌더링에 동원되는 막대한 비용이 더해지면? 결과는 뻔하게도 오로지 한두개의 방향으로만 이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게임플레이의 가장 기본인 이동부터 이런데 다른것들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93년 '스타워즈:레블 어설트'라는 게임이 발매된다. 바로 이 게임이 위와 같은 게임의 전형으로서 플레이어는 이동을 신경쓸 필요없이 그냥 화면에 보이는 적만 뿅뿅하고 쏘면 그 시점 그대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스토리 드리븐 건슈팅'이라고 할만한 장르의 시초가 되었다. 진행중 가끔씩 좌우로 화살표가 나오며 대체 이동루트를 선택하는게 슈팅 말고는 유일한 게임플레이 요소였다. 게임이라기 보다는 영화에 약간의 슈팅 요소를 첨가한 이 게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동영상'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10만장만 팔려도 잘팔린 게임 취급하던 PC시장에서 무려 수백만장을 팔아제낀 것이다.

그걸 보면서 게임하던 사람들은 다들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영화같은 프리렌더 동영상이라고 한들 게임플레이가 최소한의 기본조차도 되어있지 않은 이런 그냥 '동영상'을 수백만이 구입한다는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백만이 팔렸음에도 그 게임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일도 없었고 게임잡지에서조차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철저히 '없는 게임' 취급당하던 게임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건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씨발 이게 게임이여 동영상이여

그러나 퍼블리셔들에게는 정 반대였다. 이거야말로 그들이 돈을 쓸어담을수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게임 퍼블리셔였지만 그들에게 돈이 되는 고객은 '게이머'가 아니라 '게임보다 영화에 더 친숙한 비(非)게이머'였던 것이다. 게임이 아니라 동영상에 가까운 레블어설트류의 게임들이 마구 쏟아지자 기존의 PC게이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드벤쳐와 RPG, 워게임, 시뮬레이션같은 깊이있는 장르들을 제치고 그냥 동영상 시디나 마찬가지인 게임들이 인기를 끄는 게임계에 대해 게임잡지에서마저 한탄이 쏟아져 나왔다.

엑스컴이 94년도에 나왔는데 이때 게임잡지에서 엑스컴에 어떠한 평가를 내렸는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요즘의 그래픽+동영상 쓰레기가 아니라 게임플레이가 알찬 '올드스쿨'한 게임이라는 평가였다. 엑스컴은 그당시 결코 혁신적인 게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과는 다른 낡은 방식의 게임으로 취급되었고 게임잡지에서 조차 그걸 이유로 찬양했다. 요즘게임같지 않고 옛날게임 같아서 좋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하다니 당시의 게임계에 대한 환멸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가? 아무도 여기에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게임이 퇴보했다고 게이머들 모두가 외쳤고 게임잡지도 외쳤다.

그당시 PC게이머들은 이런 '영화같은 게임'에 호되게 당하고는 이것이 게임이 가서는 절대 안되는 길이라는걸 체득할수 있었다. 게임에서 상호작용이 줄어들면 얼마나 재미가 없는지를 이전 게임과 비교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같은 경험(영화같은 게임 이전의 게임)을 공유했기 때문에 같은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을 이해할수가 없다. 레블어설트가 기존의 게이머들에게 팔린게 아니라 예전 PC게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에게만 팔렸듯이 말이다.

옛날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영화같은 게임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이미 게임에서 영화적 요소란 뗄레야 뗄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최소한 대자본 싱글플레이 게임에선 영화같은 게임이 아니라 영화같지 않은 게임을 찾기가 힘들정도이다. 그런데 레블 어설트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게임의 영화화가 게임이라는 매체에 과연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긴 했는가?

현대게임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모던 워페어! 모던 워페어를 보자. 그런데 사실 모던 워페어는 완전히 레블어설트를 떠올리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플레이보다 스토리 보여주는게 중심인것도 그렇고 일방향 진행에 가벼운 슈팅도 그렇다. 내게는 둘의 차이점이라고는 그냥 실시간렌더링이냐 프리렌더링이냐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고 지겹게 많이 나왔고 그당시 게이머들에게 많은 지탄을 받던 그 구태의연한 게임이 그저 실시간 렌더링이라는 옷만 갈아입었는데 무려 '혁신적인' 게임으로 웹진과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찬사를 받고 수천만장이 팔리고있다.

이게 레블어설트하고 뭐가 다르냐고 십숑키들아!
도데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왜 전혀 혁신적이지 않은 게임이 혁신적인 게임으로 취급되고 왜 욕만 쳐먹던 게임이 이제는 찬사만 받고 있을까?

답은 하나 뿐이다. 게이머들과 게임웹진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당시 레블어설트를 즐기던 비(非)게이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지금 게이머의 주류인것이다. 레블어설트를 욕하던 그당시 게이머들이 바로 나같은 사람이고. 그러니까 내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의 게이머들은 게이머가 아니다. 그냥 게임보다 영화에 더 익숙한 일반인일 뿐이다. 이게 무슨 내가 게이머라는데 자부심같은걸 가진다던가 하는 그런 웃기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게이머라고 불리는 부류의 특성이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는걸 얘기하고싶은거다. 완전히 정 반대로. 180도로.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 나같은 게이머는 이상해보일수밖에 없는것이다. 변태로 보이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져서 트랜드를 따라오지 못하는걸로 보는 시각만은 제발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게임계는 90년대 초중반부터 거의 바뀐게 없다. 그때도 레블어설트가 가장 많이 팔리는 게임이었고 지금도 모던워페어가 가장 많이 팔리는 게임이다. 내가 볼때는 그런걸 대단하다고 입벌리면서 플레이하는 요즘 게이머들이야말로 오히려 한 20년쯤 뒤쳐진 게이머로 보인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점은 이제는 그냥 일반인을 게이머라고 부르는것 뿐이고 게임을 좋아하는 진짜 게이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것 뿐이다. 지금 사람들도 내가 했던 게임들을 진득하게 해보면 누구나 나같은 게이머가 되버릴수밖에 없다. 후장섹스를 경험하면 당신도 게이가 됩니다.

내가 화가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퍼블리셔들이 돈되는 영화같은 게임들만 양산하느라 진짜 게이머들을 게임판에서 다 내쫓아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아무도 이 상황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것 말이다. 오히려 문제제기 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갈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렸다. 그래서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 마저 입을 닫고 있다. 그냥 "저는 그런게 별로 취향이 아니라..." 하는 수준으로 얼버무리는게 전부다. 그래서 내가 대신 쓰려는것이다. 아무도 안쓰니까! 과거의 진짜 쟁쟁했던 게이머들에 비하면 경험도 일천하고 글솜씨도 없지만 아무도 안하니까!

물론 90년대 중반에 수많은 게이머들과 게임잡지가 문제제기를 주구장창 해댔어도 변하기는 커녕 콧방귀도 안뀌던게 게임업계였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아무런 문제제기조차 없으면 좋은 게임이 나와도 그걸 알아볼 사람이 없어서 그냥 묻혀버릴수도 있다. 그러면 손해는 결국 게임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0년 동안 계속 레블어설트가 나오고 그걸 계속 전에 없던 혁신적인 게임이라며 눈물콧물 흘리며 찬양하는 코메디가 영원히 반복될수밖에 없다.

나는 영화같은 게임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그런 게임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것도 아니다. 그 한계를 알고 제대로 평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레블어설트나 모던워페어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게임이라는 매체를 발전시킬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게임이 모범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얼마나 많이 팔리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건 상관없이 말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 게임을 좋아하는지와 그 게임이 실제로 좋은 게임인지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다. 사람마다 게임을 하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그래픽이 좋아서, 어떤 사람은 체험의 느낌이 좋아서, 또 어떤 사람은 승리의 기쁨때문에...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이유로 게임을 하고 다들 자기만의 이유로 특정 게임을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재미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게임도 소수의 좋아하는 사람들이 존재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만족할수 있는 게임리뷰라는게 존재할수 있을까? 그런걸 지향하다보면 결국 모든걸 다 긍정할수밖에 없다. 이건 그래픽이 좋으니까, 이건 분위기가 좋으니까, 이건 좋은게 아무것도 없지만 평생 비디오게임이란걸 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해보면 좋아할수도 있으니까. 그럼 이 세상에 안좋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게임리뷰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안 읽어봐도 좋은 게임인거 다 아니까. 그리고 그런 너도좋고 나도좋은 아햏햏한 정신상태로는 아무것도 발전하지 않는다.

나는 얼마나 그 게임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리뷰를 쓰는게 아니다. 그 게임이 게임이라는 매체가 해왔던 도전의 역사속에서 얼마나 유의미한 도전을 했는지, 제작자의 비전이 플레이어와 제대로 소통을 하는지, 오랜 시간을 견딜수 있을만큼의 게임적 핵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쓰는것이다. 그러니 나는 재밌었는데 너는 왜 욕하냐고 따져봐야 내가 뭐라고 대답해줄 말이 없다. 그냥 "게임을 좀 다양하게 많이 해보세요." 라는 말 정도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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