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말~80년대초의 미국 아케이드-콘솔 시장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아케이드 센터가 전국에 13000여개가 있었다고 하며 팩맨은 아타리 콘솔로만 7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80년대초에 이미 콘솔게임은 완전히 메이저한 대중문화였던 것이다. 콘솔게임이 마치 최근에 와서야 대중적인 문화가 된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콘솔게임은 처음부터 대중문화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80년대 초중반에 '아타리쇼크'로 알려진 아케이드-콘솔시장의 갑작스런 대 붕괴가 발생한다. 시장이 서서히 쪼그라든게 아니라 그냥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은 것이다. 왜 이런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당시 게임들을 직접 플레이 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과도하게 핀볼적인 방법론에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핀볼은 플리퍼 등장이후로 기본 형식이 변화한적이 없다. 플리퍼로 공을 쳐올려서 오래 버틴다는 한가지 형식으로만 수십년동안 버텨왔고 문제없이 잘 팔아먹었다. 그래서 전자 디지탈 게임도 그런식으로 해나갈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핀볼처럼 2D 레이아웃에 공을 움직이거나 총알을 쏜다는 식의 기본 형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만들어댔지만 거기에는 핀볼로부터 가져오지 못한 중요한 한가지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공의 움직임의) 무한한 다양성이다. 공의 움직임은 형편없이 단순했고 총알은 일직선으로만 나갔고 타겟의 등장순서는 매번 동일했다. 핀볼과 달리 패턴이 쉽게 반복됐고 쉽게 질렸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게임을 공급해서 양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들이 기본형식 자체에 익숙해져서 더이상 어떤 바리에이션에서도
신기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얄팍한 게임성의 맨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다. 90년대말 2000년대 초반의 DDR열풍 말이다. 나라전체가 DDR로 들썩거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확 꺼지면서 언제 그런게 있기나 했냐는 듯이 사라지는걸 경험하면서 아! 아타리쇼크가 바로 이런거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난리났던 스타크래프트는 열기가 오랜기간에 걸쳐 서서히 식은반면 왜 DDR은 갑자기 푹 꺼졌을까. 스타크래프트는 신기함이 사라진후에도 오래 지속될 게임적 깊이와 다양성이 있었지만 DDR은 신기함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핀볼이 몸을 안쓰고 손가락만 써서 흥했는데 비디오게임으로 그것이 일반화되자 다시 손가락을 안쓰고 몸을 쓰는 게임에 사람들이 신기함을 느껴버린것. 그러나 몸을 쓰는 게임이 더 원초적인 것이니 신기함이 오래 지속될수가 없다.
미국의 콘솔게임 역사도 그런식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너무나 깨끗이 너무나 깔끔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후에 비디오게임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미국에는 그냥 아케이드-콘솔 역사 자체가 없었던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남긴게 전혀 없지는 않다. 비디오게임에는 코딱지만큼의 깊이도 없어서 초딩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라는 최악의
부정적 사회 인식을 남겼고 더이상 '문화'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코난 오브라이언같은 사람을 보면 그때의 반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아직까지도 어른이 비디오게임하는걸 뭔가 웃기고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는게 방송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콘솔게임의 뿌리는 당구까지 내려가는데 당구하는 어른을 그렇게까지 볼까? 이 모든게 퐁의 성공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다. 거봐 퐁이 없었으면 더 좋았다니까.
이후로 미국은 콘솔게임을 버리고 핀볼과 퐁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 PC게임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중심으로 전자 디지탈 게임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미국이 버린 콘솔게임의 형식은 일본이 주워가서 발전시키게 된다. 그래서 이때부터 PC게임=서양게임, 콘솔게임=일본게임 이라는 요상한 구도가 되어버린다. 80년대부터 전자 디지탈 게임을 해왔던 사람이라면 이 구분이 아주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일본으로 넘어간 아케이드-콘솔게임은 아타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차피 공의 움직임에서는 핀볼을 따라가지 못하니 아예 공이 없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다. 그래서 레이싱, 격투, 스포츠, 퍼즐, 점프 기타등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다양하게 활용했는데 안타깝게도 단지 '공'을 없애고자 했을뿐 '핀볼'을 없애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공이 없는 핀볼'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 아케이드 게임에는 여러가지 장르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기본형식이 있었다.
-한판에 5~30분 정도의 플레이 타임에 맞춘 밸런스
-한판에 3개의 목숨
-특정 아이템을 먹거나 정해진 점수를 넘으면 목숨 보너스
-게임 컨텐츠의 끝에 도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반복하는 순환구조
-획득한 점수로 등수 기록
-등수 기록시 3개의 이니셜로 이름 새김
-Game over, 1-up 등의 핀볼 용어 사용
-동그란 형태의 버튼
-극단적으로 빠른 플레이 리듬, 게임내내 쉼없는 컨트롤러 조작
-매뉴얼이 필요없이 바로 알수있는 간단한 게임방식
이 모든게 핀볼에서 그대로 가져온 형식들이다. 이걸보면 비디오게임은 일본으로 넘어왔어도 여전히 핀볼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는걸 알수있다. 이제 그당시 확립된 대표적인 아케이드-콘솔 장르들을 간단하게 점검해 보자.
먼저 전통의 슈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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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디우스 (1985) |
기본 형식은 아타리 시절과 별 다를바 없지만 총알의 다양한 움직임과 레벨업, 배경 스크롤을 활용해 최대한 단조로움을 덜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하드웨어가 발전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거대한 레벨디자인을 만들어낼수 있게 되었지만 목표점이 여전히 '핀볼'이었기 때문에 코딱지만큼이라도 난해한 레벨디자인은 용납될수 없었고 그냥 한쪽 방향으로만 스크롤되는 순차적인 레벨디자인을 사용하게 된다. 덕분에 핀볼에 비해 지독한 선형성이 발목을 잡는다.
5~30분의 플레이 타임을 맞추기 위해 난이도는 선형적으로 어려워지는데 컨텐츠 제공까지 일방향이라면? 처음 30분 분량만 좆나게 반복하게 되는거다.-_-; 그래서 슈팅게임은 암기과목이 되어버린다.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져서 한번에 암기가능한 분량은 점점 줄어들어가며 이미 암기되어 있는 부분은 너무 많이 플레이해서 오바이트가 나올거같은 느낌이 들게 되는 뭐 그런 병신같은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장르는 망해버린다. 현재는 탄막슈팅이라고 총알이 막 무더기로 쏟아지는걸 피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는데 왜냐면 이게 그나마 선형성이 덜하기 때문이다. 총알회피가 암기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라서 여러번 반복해도 다른 상황이 자주 나오는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핀볼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수는 없다.
건슈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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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사냥 (1984) |
비디오게임의 슈팅은 핀볼의 변형이지만 1인칭의 건슈팅 장르는 핀볼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냥 놀이공원에 있는 인형맞추기 슈팅게임같은걸 그대로 가져온거니까. 이것도 핀볼 이상으로 오래된 장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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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버그 레이오라이트 (1936) |
1936년에 나왔다는 무려 빛센서를 이용한 건슈팅 게임이다. 오리사냥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지? 이 장르는 FPS 나오면서 흡수됐다고 봐야할지 콜옵이 충실하게 계승했다고 해야할지...-_-;
아케이드 레이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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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런 (1986) |
자동차를 소재로한 뭔가 완전히 새로운 장르인듯 보이지만 아케이드 레이싱은 실은 고전적인 슈팅게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르다. 모습만 자동차일뿐 차제가 회전을 하는게 아니라 레일 안에서 좌우로 사이드스텝을 한다. 그러니까 퐁에서 막대기가 좌우로 움직이는거나 슈팅게임에서 비행기가 좌우로 총알을 피하는것처럼 움직인다는거다. 이런 움직임으로 무슨 진지한 레이싱이 가능할리가 없기 때문에 다른 차량이나 장애물과의 충돌을 피해 움직이는게 게임플레이의 주가 된다. 결국 총알을 피하는 대신 차와 커브를 피하는 스킨만 다른 게임이 된것이다.
물론 90년대 중반부터 3D그래픽이 아케이드시장에 도입되자마자 이 포맷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진짜 3D레이싱 게임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방식은 아케이드-콘솔쪽에서 발생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PC게임쪽에서 발전했던 레이싱시뮬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아케이드시장에 맞게 단순화/간소화 시켰을뿐이었다. PC쪽의 여러 시뮬레이터 장르중에서 유일하게 아케이드-콘솔쪽으로 넘어온게 레이싱인데 그 이유는 레이싱 자체가 핀볼처럼 끊임없이 동적이고 연속적이며 인터페이스가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비행시뮬은 수많은 계기를 조작해야 하고 외워야 할게 산더미같이 많으며 잠수함시뮬은 거기에 더해 극도로 정적이기까지 하다. 유일하게 레이싱시뮬만이 머리보다 몸으로 익히는게 중요하다. 핀볼의 철학과 맞지 않는 시뮬레이션 장르임에도 고전적인 공놀이게임의 특성인 신체적/연속적/동적 특성에 완전히 부합하므로 별다른 변형 없이도 그대로 사용이 가능했던것이다. 그래서 이 장르는 2D에서 3D로 변하자마자 PC게임에게 먹힌 장르이다. 마리오카트 정도가 아케이드 레이싱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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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발리 볼 (1989) |
원래 핀볼은 공놀이의 간소화다.
쉽고 편한 공놀이가 핀볼인것이다. 그럼 공놀이를 쉽고 편하게 할수 있으면 굳이 핀볼일 이유는 없는것이다. 그래서 농구, 축구, 야구, 배구 등등 메이저 공놀이를 그대로 카피해서 쉽고 편하게 비디오게임으로 즐길수 있게 만드는것만큼 핀볼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핀볼의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은 없다. 공의 움직임은 현실을 쫓아가지 못하지만 대신 핀볼에는 없는 다수의 플레이어 캐릭터 활용과 좀더 복잡한 룰이 재미를 보충한다. 워낙 익숙하고 친숙한 게임들이라 신기함이 빠져서 한번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이고 꾸준하게 인기를 지속할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살아남은 게임을 카피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 장르가 시뮬레이션으로 변할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 핀볼보다도 더 원시적인 순수 공놀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플랫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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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마리오 부랄더스 3 (1988) |
슈퍼마리오로 대표되는 플랫포머 장르는 '공없는 핀볼'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으나 공이 없다기 보다는 공을 공이 아닌것처럼 위장한것에 가깝다. 그게 뭔소리냐고? 슈퍼마리오의 기본 메카니즘을 살펴보자. 점프 버튼을 누르면 마리오가 위로 솟구치고 정점에서 머리로 블럭을 때린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데 스틱으로 착지 지점을 조절하며 착지에서 괴물을 밟아 죽인다. 마리오가 바닥이 없는 구멍으로 빠지면 죽는다. 핀볼의 기본 메카니즘은? 플리퍼 버튼을 누르면 공이 위로 솟구치고 정점에서 타켓을 때린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데 넛지로 착지 지점을 조절하며 플리퍼로 공을 받는다. 공이 플리퍼 아래쪽의 구멍으로 빠지면 죽는다. 기본이 핀볼하고 똑같다.
왜? 못믿겠는가? 그럼 아예 대놓고 커밍아웃한 소닉을 보면된다. 소닉은 마리오처럼 자신의 정체를 감추지 않는다.
캐릭터가 그냥 아예 핀볼 공이 되어버림ㅎㅎ
움직임도 핀볼 공처럼 슝슝 날아다니고 통통 튕김ㅎㅎ
레벨디자인에는 그냥 대놓고 플리퍼, 범퍼, 슬링샷, 레인같은 핀볼 장치들을 아무 변형없이 그대로 집어넣음ㅎㅎ
그냥... 핀볼을... 만드시죠...
그래서 그냥 핀볼도 만들어버림ㅋㅋㅋㅋ 제목은 소닉's 핀볼이 아니라 소닉 스핀볼
이 장르도 핀볼보다 공의 움직임이 훨씬 단순하기 때문에 기본 플레이의 밀도가 떨어지므로 핀볼에는 없는 스크롤되는 커다란 레벨디자인으로 부족한 밀도를 메꿔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슈팅장르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선형성을 불러온다. 선형성은 핀볼과 같은
중독성이 핵심인 게임에서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다. 소닉은 난이도를 낮추고 길을 여러개 만들어 둬서 타임어택을 유도해 선형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슈퍼마리오는 월드맵 개념을 발전시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핀볼에 비하면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것은 어쩔수 없다.
스크롤 격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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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날 파이트 (1989) |
스크롤 격투게임은 공을 없애는데는 확실히 성공한 장르다. 가끔 뭘 던져서 맞추기도 하지만 메인은 근거리로 붙어서 적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적도 플레이어를 두들겨 패려고 하기 때문에 근거리에서 미묘한 간격/타이밍 싸움이 발생하는데 AI가 매우 후지기 때문에 단조로운 타이밍 싸움을 여러마리의 적을 한번에 쏟아부어 양으로 해결한다. 이 타이밍 싸움은 슈팅장르의 총알과 여백처럼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것이 아니고 적도 항상 똑같은 길로만 이동하는게 아니라서 슈팅처럼 토악질 나오는 암기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스크롤되는 배경과 동일한 적의 등장순서 때문에 선형성의 문제를 안고있다.
테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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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테트리스 (1988) |
'공없는 핀볼'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는 웃기게도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의 한 개발자에 의해 태어난다. 테트리스에는 핀볼과 핀볼이 아닌것들이 전자 디지탈 환경 안에서 완벽하게 조합되어 있다. 핀볼과는 반대로 블록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고(핀볼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공을 쏜다), 핀볼과는 반대로 위로 넘치지 않게 해야 하며(핀볼에서는 아래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핀볼과는 다르게 블록이 격자에 의해 디지탈적으로 움직이며(핀볼은 아날로그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다), 핀볼과는 다르게 블록을 끼워맞추는 퍼즐인데(핀볼은 퍼즐이 아니라 공놀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핀볼처럼 중력이 존재하는 상하로 길게 세팅된
2차원 게임공간 안에서, 핀볼처럼 실시간으로, 핀볼처럼 1인용으로, 핀볼처럼 극단적으로 빠른 플레이 리듬을 지니고, 핀볼처럼 끊임없는 컨트롤러 조작을 요하고, 핀볼처럼 완전히 비선형적이어서, 핀볼처럼 실력이 붙으면 아무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인지 게임이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트랜스 상태에 빠져 시간가는줄 모르는 미칠듯한
중독성을 지니면서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이 완전하게! 완벽하게! 마치 원래부터 이런게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조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공이!!! 없는데!!! 마치!!! 핀볼을!!! 하는것!!! 같애!!!
퐁이 결과적으로 꿈꿨지만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는 몰랐던 그것이 테트리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디지탈 퍼즐로 아날로그 공놀이의 재미를 재현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정도면 핀볼을 뛰어넘었다고는 못해도 핀볼과 동급인 게임이라고 할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핀볼은 기본 메카니즘은 그대로 두고 테이블 디자인만 바꿔도 계속 새로운 느낌으로 플레이 할수 있었으나 테트리스는 그게 불가능했다. 아무리 퍼즐 메카니즘을 바꿔봤자 테트리스만큼의 직관적이면서도 부담없고 그러면서도 퍼즐적인 느낌을 주는 그런 기막힌 메카니즘을 쉽게 찾을수는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핀볼의 모든 조건을 만족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재탕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드디어 황무지에서 인간을 대체할 슈퍼뮤턴트를 만들어냈는데...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대전격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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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트 파이터 2 (1991) |
돈버는게 목적인 아케이드-콘솔게임이 재탕이 안되면 무슨 소용? 그래서 대전격투가 나오게 된다. 물론 대전격투 게임은 아주 초창기부터 존재하던 장르였지만 91년에 나온 스트리트 파이터2는 대전격투 장르의 기본을 새로 쓴다. 스트리트 파이터2에 대한 얘기는 다 아는 얘기니까 자세하게 쓰지 않겠다. 이후에 벌어진 일만 봐도 이 게임이 어떤 의미였는지 대충 알수있다. 한국에서도 그당시 '오락실'에 다녔던 아케이드 게이머였다면 순식간에 오락실의 기기들이 대부분 스트리트 파이터2로 대체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다양한 장르의 기기들이 공존했지만 스파2가 나오자 마자 그런 다양성은 몰살되고 오로지 스파2, 이후에도 오로지 또다른 대전격투게임만 줄창 나올 뿐이었다. 왜? 돈버는게 목적이니 돈이 많이 들어오는 기기로 대체하는게 당연.
대전격투는 기존의 아케이드-콘솔게임의 주 장르였던 스크롤 형식의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선형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대전 상대인 '사람'을 필요로 하긴 했지만 게임을 못할 정도로 공급이 딸리는 일은 없었고 업주 입장에서는 일타이피로 돈을 버니 더 좋았다. 선형성 문제가 해결되서 사람들이 쉽게 질리지도 않고 어설픈 움직임의 공도 없고 회전율도 더 빨라지고 재탕도 쉽고 우와 이거 뭐 거의 꿈의 아케이드 게임이네. 그래서 90년대는 대전격투의 시대가 된다. 결국 '공없는 핀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대전격투도 게임 내적인 문제가 있었다. 강한 기술을 쉽게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요상하고 복잡한 커맨드 입력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입력의 어려움이 아니라 어려움을 위한 작위적인 어려움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장르에 익숙해지고 역치가 높아지자 더 깊이 있는 게임을 요구하게 되면서 기술의 종류도 갈수록 많아지고 커맨드 입력도 점점 어렵게 된다. 콤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기나긴 콤보가 하나의 기술이 되고 이 기술을 위한 입력 커맨드는 미친듯이 길고 어려운 타이밍 맞추기가 된다. 결국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돌리는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야 하는 이상한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편하고 쉬운 심심풀이오징어땅콩이라는 핀볼의 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특성이라 다시 시장의 축소를 가져오게 됐고 아케이드 시장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리듬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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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매니아 (1998) |
핀볼이 대전격투를 통해 타이밍 맞춰서 빠르게 버튼 누르는 게임으로 변하자 뭐 쓸데없이 격투를 주제로 하고 그러냐 그냥 엑기스만 뽑으면 되지^^ 해서 리듬게임이 나온다. 이 장르는 화면에 여기 누르고 저기 누르세요 하고 표시가 나오는걸 보고 타이밍 맞춰서 딱딱 누르면 된다. 그냥... 할말이 없다. 아케이드-콘솔게임의 기나긴 방황의 역사는 결국 이렇게 결론이 난것이다. '화면의 표시에 맞춰 버튼을 누르시오.'
퐁에서 시작된 전자 디지탈 아케이드-콘솔게임의 역사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50년간 핀볼을 목표로 정진해왔지만 거기에 다다른 게임은 테트리스와 대전격투뿐이었다. 그런데 컴퓨터라는 인류의 혁신적 기술로 만들어낼수 있는 게임의 한계치가 정말 그정도 뿐인가? 왜 하필이면 핀볼을 모델로 잡는가? 핀볼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게임인가? 애초에 핀볼은 당구가 그랬듯이
편함과
쉬움을 얻기 위해 공의 움직임을
2차원으로 제한한 게임성을 타협한 물건이다. 게임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게임도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돈을 벌기에 적합한 모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콘솔게임이라는건 게임 이전에 돈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타이밍 맞추기 게임은 근본적으로 디지탈이 아날로그를 이기기 어렵다. 게임의 전자 디지탈화에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면 타이밍 맞추기 게임 따위 애초에 만들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콘솔게임에서는 그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하다. 전혀 맞지 않는 옷인데 그걸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콘솔게임에서는 게임의 전자 디지탈화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것이다. 그냥 고전적인 공놀이 게임이 타이밍 맞추는 게임이니까 그걸 생각없이 따라할 뿐이다. 그래서 콘솔게임의 역사는 50년이 아니다. 콘솔게임에서 전자 디지탈화는 단지 기술의 발전이었을 뿐 개념의 변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류가 되어버렸으니 전자 디지탈 게임의 진정한 발전은 요원한 것이다.
따라서 콘솔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들도 게임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핀볼에 박혀있다. 핀볼적이지 않은 게임은 게임취급도 안한다. 예를들어 볼까? 콘솔게이머들은 게임은 배우기 쉽고 마스터하기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걸 핀볼보다 더 완벽하게 구현한 게임이 어디있나. 핀볼은 버튼 두개가 전부다. 게임로직이라고는 그냥 공을 쳐서 안떨어뜨리는게 전부다. 근데 마스터 가능한가? 영원히 공을 안떨어뜨릴수 있나? 영원히 불가능하다. 무한프레임, 무한해상도 때문에 깊이가 끝이없다.
또 취향 안타는 게임이 훌륭한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만큼 취향 안타는 게임이 존재하나?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수 있고 아무런 사전지식도 필요하지 않다. 외울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버튼 두개를 누를수 있는 손가락만 있으면 된다. 그들이 말하는 취향을 타지 않는 게임이란 핀볼같다는 말과 동의어다.
타격감이 쩔어야 한다고도 한다. 근데 내가 해본 어떤 콘솔게임도 핀볼만큼 타격감이 있는 게임은 없었다. 아무리 화면이 번쩍이고 움직임이 경직되고 쾅쾅 소리가 나봤자 핀볼에 비하면 타격감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쇠공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날아다니면서 실제 사물을 때려대는 진짜 타격감을 느껴보면 전자 디지탈 디스플레이로 뚝뚝 끊기는 조잡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타격감을 느껴보려는 시도 자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게임은 30분 해봐서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의 게임 밸런스가 대충 한판에 최대 30분을 잡는다. 그이상 길어지면 돈을 많이 못버니까. 그래서 핀볼에서는 동전 하나 넣고 30분 했으면 아주 뽕을 뽑은 것이고 그 게임을 잘 한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30분 해도 재미없었으면 재미없는 핀볼이지.
게임은 플레이 내내 끊임없이 플레이어의 흥미를 유지시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도 한다. 핀볼은 수동적인 게임이다. 내가 원하는 때에 공을 때리는게 아니라 공이 때릴 위치에 오면 반드시 공을 때려야 하는데 그 빈도가 아무생각도 안들만큼 짧은 간격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핀볼은 오래하다보면 내가 공을 치는게 아니라 공이 내 손가락을 움직이는것처럼 느껴진다. 공이 살아있는 동안은 게임을 멈출수가 없다.
게임은 스트레스 받으면 안된다고도 한다. 원래 핀볼은 스트레스 없고
편하고 쉬운 심심풀이오징어땅콩이라니까.
많이 팔리는 게임이 좋은게임이고 잘만든 게임이라고도 한다. 핀볼은 자본집약적이다. 아주 정교한 기계장치인데 대량생산을 해야 하므로 큰 공장이 필요하다. 큰 공장을 유지시키려면 돈이 많이 벌려야 한다. 그래서 핀볼에 대중성과 상업성은 필수불가결이다. 다른 공놀이들과 다르게 막대한 자본 없이는 핀볼이 존재할수가 없다. 핀볼은 게임 이전에 '산업'인 것이다.
게임에 대한 이러한 인식들은 다 핀볼의 철학이지 게임이라는 매체 전부를 통괄하는 철학이 아니다. 핀볼은 게임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뿐인데 그걸 전자 디지탈 게임 전체에 요구하는 꼴인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잖아? 오히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지. 그래놓고는 나보고 뭐? 게임을 보는 관점이 편협하다고? 아니, 너네들이 편협한거야. 내가 보수적이라고? 아니, 너네들이 보수적인거야. 내가 꼰대라고? 아니, 너네들이 꼰대야.
그리고 너네들을 그렇게 만든 모든 원인은 퐁에 있는거고.
퐁 개새끼 해봐.
콘솔게임의 역사는 이걸로 마치고 다음편부터 본격적인 PC게임의 역사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