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의 RPG가 죽었다는 개소리와 함께 CD롬의 대중화로 용량만 믿고 동영상만 잔득 쳐넣은 쓰레기같은 게임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많은 RPG팬들이 PC게임계에 실망을 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게임이 예전보다 재미가 없어졌다는 얘기가 처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시점이었다. 베데스다나 루킹글래스같은 새로운 제작사들이 2D와 비실시간이던 CRPG를 3D와 실시간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지만 이들만으로는 예전의 전설적인 제작사들의 공백을 메꾸기에는 부족했다.
기다림에 지쳐 다들 희망을 버리고 있을때 스톤키프로 지옥을 갔다온 인터플레이가 폴아웃이라는 의외의 게임을 발매한다. 놀랍게도 이 게임은 거의 10년전 동사의 전설적인 명작 웨이스트랜드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웨이스트랜드의 제대로 된 후속작을 누구나 기다렸었지만 스톤키프로 뻘짓을 하다 망하기 직전까지 간 인터플레이에 10년전의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던 시점이었다.
TRPG적인 룰,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퀘스트, 비선형적인 스토리 진행, 선택에 따른 결과의 변화등 정식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스템적인 면이 그대로 계승되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설정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폴아웃은 단지 웨이스트랜드의 그래픽 업 버전이 아닌 거기에 새로운 시도가 더해진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RPG의 3대 요소로 던전, 퀘스트, 룰을 언급했지만 사실 CRPG에는 TRPG와 비교했을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RP(Role Play)라고 부르는 캐릭터의 퍼스날리티 연기였다. 3D던전이 가능해짐으로 인해 CRPG는 던전 부문에서는 오히려 TRPG를 능가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퀘스트면에서는 울티마가 심리스 오픈월드에서 비선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서 차별적인 아이덴티티를 획득했고 룰은 이미 웨이스트랜드로 TRPG와 근접한 수준을 보여줬지만 어떤 게임도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에 퍼스날리티를 부여해 가상의 인격을 연기할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던 문제였고 CRPG가 진정한RPG가 되기위해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였음에도 감히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다. 왜냐면 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RP를 제외한 모든것은 어떻게든 미리 준비할수 있지만 인간의 애드립은 인간수준의 AI를 만드는것 외에는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대처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 대처는 커녕 애드립을 칠 인터페이스조차 만드는게 불가능하다.
폴아웃은 이 정복될수 없는 마지막 남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게임이었다. 준비된 대사지문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RP의 가능성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주관식 키워드 입력 시스템도 같이 제공했기에 객관식 지문선택이 주는 갑갑함도 해소되었다. 대사지문은 항상 같은게 나오는게 아니고 생성한 캐릭터의 능력과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제공되었으며 그에따라 게임의 진행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폴아웃의 스토리가 RP가 의미있을 정도의 밀도가 없었으므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에게 약간의 캐릭터 인격의 선택권을 부여했을지언정 그것이 스토리 전체와 전면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었다. 그래도 어쨌건 폴아웃은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CRPG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준 게임이었다.
97년에 나온 이 폴아웃이라는 게임은 3D 던전에 적응하지 못한 퀘스트RPG팬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게임이었을 뿐 아니라 인터플레이와 같은 전통의 RPG제작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돌아옴을 알리는 반가운 전령이었다. 3대 RPG의 마지막 주자인 웨이스트랜드, RPG의 황금기가 시작된 88년의 그 웨이스트랜드가 폴아웃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RPG의 르네상스가 임박했음을 알리러 왔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귀환인가!
폴아웃의 성공으로 죽어가던 인터플레이는 기사회생했고 그동안 침묵했던 CRPG의 위대한 개척자 울티마도 울티마 온라인으로 CRPG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대변혁을 일으킨다. 이제 위저드리와 마이트앤 매직만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으로 돌아오면 3D쇼크로 선배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잘난 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RPG의 황금기를 불러 일으키는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동안 조용했던 RPG에 서광이 비추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씹스럽게도 시대의 흐름은 RPG의 편이 아니었다. RPG의 미래가 밝아지려는 그 순간, 재수없게도 딱 그 시기에 PC의 운영체제가 대 변혁을 이루고 만다. 윈도우98이 발매되면서 PC환경은 드디어 기나긴 도스 체제와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 사용이 쉬운 윈도우 체제로 전면적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사실 도스라고 사용에 그렇게 어려운 부분이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모든걸 명령어 타이핑으로 한다는게 분명히 많은 사용자를 막는 장벽의 역할을 했다. 윈도우 98이 나오면서 이 장벽이 무너졌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PC로 유입됐다. 이제 PC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사라졌고 한집에 PC한대는 TV와 같은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더 나쁜것은 윈도우98전의 윈도우95가 게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도스와 윈도우98간의 징검다리를 끊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윈도우95는 과도기적 OS였고 PC의 퍼포먼스를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도 모자른 PC게임의 세계에선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윈도우 환경보다 도스환경을 우선시할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유저들이 윈도우95만을 쓰는데 비해 많은 게임은 여전히 도스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유저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윈도우95로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은 윈도우95용으로만 실행되는 제한된 게임들만 할수 밖에 없었고 도스로 발매된 이전의 모든 RPG는 전혀 즐길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게임을 갈라놓고는 윈도우98로 도스게임을 죽이는 결정타를 날려버린것이었다.
오염물질이 조금씩 계속 들어오면 물은 그것을 정화시켜 같은편으로 만드는게 가능하지만 기존의 물의 양을 가뿐하게 압도하는 엄청난 양이 한꺼번에 들어오게되면 정화는 불가능하다. 그냥 전체가 오염될수밖에 없다. 윈도우98로 인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양의 새로운 PC사용자들은 기존의 도스 게이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제 PC게임계에 'PC게이머'가 사라져 버렸다. PC게임의 역사를 함께 해왔기에 까다로운 기준이나 요구사항을 갖고 있던 기존의 PC게이머의 숫자는 새발의 피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묵살되었다. 절대 다수가 게임을 처음 접하거나 콘솔게임만 하던 사람들로 이전의 PC게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CRPG는 오랫동안 많은 발전을 해온만큼 이미 그당시 RPG들은 뉴비들이 쉽게 건드릴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매뉴얼은 기본이 100페이지에 룰도 복잡했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필요했다. 윈도우95나 98로 유입된 새로운 게이머들은 D&D나 TRPG가 뭔지도 몰랐고 복잡한 룰에 길고 어려운 게임을 하기보단 그저 RTS처럼 배우기도 쉽고 빠르게 끝나는 짧은 호흡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한편, 셰터드 스틸이라는 액션게임을 만들었던 캐나다의 듣보잡 제작사 바이오웨어는 '배틀그라운드 인피니티'라는 원대한 MMO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걸 몇몇 퍼블리셔에 들고갔지만 전부 씹혔고 오직 인터플레이 혼자만이 '엔진은 쓸만해 보이니까 이걸로 싱글플레이용 D&D 게임이나 만드쇼' 해서 바이오웨어는 울며 겨자먹기로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원하지도 않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바이오웨어라는 회사는 PC의 다른 RPG메이커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RPG를 만들었다. 90년대 중반에 PC게임계에서 가장 시장이 큰 장르는 FPS와 RTS였고 이미 발전할대로 발전해버린 RPG는 대단히 만들기 까다로운 장르였기에 신규 제작사가 특별한 능력 없이는 손대기가 힘든 장르였다. 예전의 RPG제작사들이나 이제와서 새로 RPG리그에 가입한 제작사들이나 모두 돈을 벌기 위해 RPG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D&D와 RPG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존경심과 이루고자하는 특별한 비전이 있었기에 RPG를 만든것이었다. 그들에게 RPG는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전통적인 RPG를 만들 생각도 없었고 인터플레이라는 퍼블리셔에 의해 바라지도 않은 D&D라이센스에 맞춰 억지로 엔진을 뜯어고쳐야 했던 바이오웨어에게는 RPG장르의 전통을 따르리라고 기대할수는 없는 것이었다.
98년, 윈도우98의 광풍이 몰아치던 해에 D&D와 포가튼렐름의 타이틀을 달고 나온 바이오웨어의 발더스게이트는 전혀 D&D스럽지도, 포가튼렐름스럽지도 않은 괴상하게 왜곡된 모습이었다. 골드박스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D&D라이센스 RPG였음에도 어디에도 그 향취를 발견할수 없었다. 퀘스트는 전형적인 일본RPG식 일방적 전개였고 던전은 그저 경험치 먹는 전투장에 불과했고 룰은 실시간에 턴제룰을 아무런 튜닝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바람에 D&D룰을 쓰면서도 D&D의 전투양상과는 100만 광년쯤 떨어진 괴상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스토리마저 배경과 전설에 비중을 둔 서양 판타지의 느낌이 아닌 캐릭터의 관계중심인 일본RPG를 그대로 빼닮았다.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RPG장르는 당연히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 핵앤슬래쉬였음에도 바이오웨어는 이걸로 퀘스트RPG를 만들었고 배경과의 아무런 인터렉션이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퀘스트RPG는 일본RPG밖에 없었다.
일본RPG라는것은 울티마 초기작을 배낀 드퀘를 다시 파판이 배끼면서 정립된 복제의 복제같은 열화된 장르였다. 울티마를 콘솔에서 즐기기 위해 초딩용으로 단순화 시킨것이 드퀘였고 이것마저 복잡하다고 더 단순화시킨게 파판이었으며 그걸보고 드퀘마저도 4편부터 파판의 노선을 걷게된다. 드퀘팬들이 최고로 꼽는 명작이 드퀘3편인데 이게 딱 파판의 영향없이 울티마 3편까지의 요소를 적당히 카피하고 단순화 시킨 물건이었다. 드퀘3이 88년에 나왔는데 울티마3이 83년 작품이니 무려 5년이나 늦은데다가 88년은 서양에서는 이미 울티마5에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일본RPG는 거기서 발전은 커녕 끝없는 퇴보만 거듭했으며 결코 울티마3의 수준조차 구현한 게임이 없었으니 서양RPG에 비하면 얼마나 후진것인지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서양RPG입장에서는 울티마4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퀘스트RPG가 시작되었다고 볼수있기 때문에 일본RPG는 애초부터 퀘스트RPG도 아닌것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일본RPG의 진행을 답습한 발더스게이는 한마디로 울티마4로부터 발전되어온 그동안의 모든 퀘스트RPG의 특성을 그냥 깡그리 무시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마치 이제와서 피쳐폰이 최신식 휴대폰이라며 출시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90년대 초반에 나왔더라면 온갖 쌍욕을 들어쳐먹으며 사라졌을 이 게임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뿐만이 아니라 정통 D&D식 서양RPG에 CRPG의 구세주로까지 일컬어지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만다. 이는 전적으로 그 전의 RPG를 즐겨보지 못한채 윈도우98로 대거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과 병신같은 게임 저널리스트들의 환상적인 조합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PC용으로 나온 RPG를 발더스게이로 접하고는, 또 게임잡지에서 서양RPG의 부활이니 뭐니 떠들어대니 이게 바로 서양RPG의 전형인가보다 하고 오해를 한것이다.
인터넷에 웹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기존의 대형 잡지들이 수익을 얻지못해 죽어나갔고 RPG에 나름 전문성이 있던 그전의 게임 저널리스트들은 이미 90년대 중반 RPG가 죽었다며 다 빠져나가버렸다. PC게임 저널리즘 전반은 RPG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과 콘솔에서 건너온 병신들이 걸작에 욕을하고 졸작을 명작으로 둔갑시키는 개판 5분후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계획한 악마적인 계락같았다. 잠시 RPG가 집을 비운사이 RPG가 죽었다며 RPG팬들을 내쫓고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사용자를 갈라놓은후 다시 RPG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자 윈도우98로 RPG의 역사를 완전히 단절시킨뒤 새롭게 유입된 게이머들에게 이것이 진짜 RPG라며 처음으로 보여준게 바로 이 거지같은 발더스게이였던 것이다. 이 무슨 RPG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가 뒤에서 암약했다고 볼수밖에 없는 기막힌 우연의 연쇄란 말인가.
이때쯤 되서 과거의 본좌들이 드디어 오랜 수련을 끝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의 귀환은 발더스게이의 성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발더스게이가 없었어도 같은 시점에 나왔을 게임들이었다. 그런데 단지 발더스게이의 상업적 성공 후에 이런 게임들이 나왔다는 이유로 병신들은 마치 이게 발더스게이의 업적인냥 떠들어댔고 그 결과로 발더스게이가 RPG의 부활을 이끈 구세주로 취급받게 된다. 발더스게이 앞에 나온 폴아웃은 완전히 무시한채로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게임들은 발더스게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들이었고 발더스게이가 선점한 윈도우98게이머들은 이 본좌들을 매우 낯설어 했다. 그들은 그저 발더스게이의 후속작과 바이오웨어가 만들 게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RPG를 만드는 서양제작사가 당시에는 바이오웨어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후 몇년사이에 던전RPG는 완전히 망해버렸고 울티마는 급조된 9편으로 스스로 자살해버렸고 인터플레이는 폴아웃의 제작자들을 내쫓음으로서 과거의 위대했던 RPG제작사들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서양RPG의 전통은 끊어질락 말락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고 만다.
발더스게이 이후에 정통 퀘스트RPG로서 유일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은 모로윈드 뿐이었다. 모로윈드야말로 울티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퀘스트RPG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그래픽이나 모드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모로윈드의 게임플레이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베데스다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게임도 발더스게이 같은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했고 상업적으로도 발더스게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공했는데 아무도 모로윈드를 RPG의 왕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발더스게이가 RPG의 왕으로 취급받았고 바이오웨어를 최고의 RPG제작사로 대접했다. 그래서였는지 베데스다는 이후 엘더스크롤4편인 오블리비언을 콘솔로도 발매했고 게임은 그에 걸맞게 퀘스트RPG의 전통을 무시하는, 단지 서브퀘스트가 엄청나게 많은 일본RPG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바이오웨어를 뛰어넘는 최고의 RPG제작사 대접을 받게된다.
바이오웨어와 발더스게이 덕분에 이제 일본RPG가 아니면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A에서 B로 가라고 직접 지시해주는 게임이 아니면, 엔딩까지 손을 잡고 게이머를 모셔가주지 않으면 아무도 플레이 할수 없는 수준까지 게이머들의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이다. RPG를 즐길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RPG를 즐기게 해주자는게 드퀘의 목적이었고 거기서 나온게 일본RPG였으니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의 관심을 끌려면 결국 일본RPG의 길을 걷는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엘더스크롤이 모로윈드에서 룰과 던전을 버리고 퀘스트에 집중했다면 오블리비언에서는 퀘스트마저 포기함으로서 베데스다도 이제 더이상 서양RPG의 적자라고 불릴수 없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RPG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루킹글래스와 함께 서양RPG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는 이렇게 변절하며 퀘스트RPG의 희망 조차도 꺾어버렸다.
울티마에서 시작된 퀘스트RPG의 전통도 이렇게 사망에 이르고 만다. 게이머들에게서 던전RPG가 뭔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것과 마찬가지로 발더스게이에 의해 퀘스트RPG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더이상 게이머들은 RPG에서 던전과 퀘스트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래픽, 액션성, 타격감, 모션, 필드가 얼마나 넓은가, 스토리가 얼마나 인상적인가,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따위의 RPG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차적인 부분으로 RPG의 발전을 논하고 있다. 알맹이는 이미 죽어서 없어진지 오래인데 껍데기만 보면서 발전하네 마네 떠들고 있는 것이다.
D&D로 시작된 CRPG가 D&D라이센스 게임, 그것도 울티마3가 일본으로 건너가 병신화되어 한참후에 돌아온 놈한테 결정타를 맞고 사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코메디스러운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아쉬움에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주체할수가 없다. 발더스게이만 없었더라면... 윈도우98이 도스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엑스박스가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궁극의 RPG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헛소리 같은가? 발더스게이같이 장르를 왜곡시키는 성공작이 없었던 비행시뮬쪽은 현재 그 궁극의 게임들이 나오는 중이다. 나오는 숫자는 적지만 DCS시리즈 같은 비행시뮬은 예전에는 정말 꿈속에서나 볼수 있었던 믿어지지 않는 게임들이다. RPG게이머들의 장르에 대한 이해가 계속 계승 되었더라면 RPG의 미래는 밝았을 것이다.
발더스게이 개새끼 해봐!
발더스게이 개새끼!
윈도우98 개새끼!
엑스박스 개새끼!
그럼 마지막으로 RPG 3대 요소중 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에너지가 다 떨어진 관계로 다음 이시간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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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지쳐 다들 희망을 버리고 있을때 스톤키프로 지옥을 갔다온 인터플레이가 폴아웃이라는 의외의 게임을 발매한다. 놀랍게도 이 게임은 거의 10년전 동사의 전설적인 명작 웨이스트랜드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웨이스트랜드의 제대로 된 후속작을 누구나 기다렸었지만 스톤키프로 뻘짓을 하다 망하기 직전까지 간 인터플레이에 10년전의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던 시점이었다.
TRPG적인 룰,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퀘스트, 비선형적인 스토리 진행, 선택에 따른 결과의 변화등 정식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스템적인 면이 그대로 계승되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설정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폴아웃은 단지 웨이스트랜드의 그래픽 업 버전이 아닌 거기에 새로운 시도가 더해진 작품이었다.
CD롬 때문에 동영상으로 쳐바른 쓰레기들 난무
지금까지 RPG의 3대 요소로 던전, 퀘스트, 룰을 언급했지만 사실 CRPG에는 TRPG와 비교했을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RP(Role Play)라고 부르는 캐릭터의 퍼스날리티 연기였다. 3D던전이 가능해짐으로 인해 CRPG는 던전 부문에서는 오히려 TRPG를 능가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퀘스트면에서는 울티마가 심리스 오픈월드에서 비선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서 차별적인 아이덴티티를 획득했고 룰은 이미 웨이스트랜드로 TRPG와 근접한 수준을 보여줬지만 어떤 게임도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에 퍼스날리티를 부여해 가상의 인격을 연기할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던 문제였고 CRPG가 진정한RPG가 되기위해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였음에도 감히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다. 왜냐면 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RP를 제외한 모든것은 어떻게든 미리 준비할수 있지만 인간의 애드립은 인간수준의 AI를 만드는것 외에는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대처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 대처는 커녕 애드립을 칠 인터페이스조차 만드는게 불가능하다.
폴아웃은 이 정복될수 없는 마지막 남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게임이었다. 준비된 대사지문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RP의 가능성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주관식 키워드 입력 시스템도 같이 제공했기에 객관식 지문선택이 주는 갑갑함도 해소되었다. 대사지문은 항상 같은게 나오는게 아니고 생성한 캐릭터의 능력과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제공되었으며 그에따라 게임의 진행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폴아웃의 스토리가 RP가 의미있을 정도의 밀도가 없었으므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에게 약간의 캐릭터 인격의 선택권을 부여했을지언정 그것이 스토리 전체와 전면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었다. 그래도 어쨌건 폴아웃은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CRPG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준 게임이었다.
97년에 나온 이 폴아웃이라는 게임은 3D 던전에 적응하지 못한 퀘스트RPG팬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게임이었을 뿐 아니라 인터플레이와 같은 전통의 RPG제작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돌아옴을 알리는 반가운 전령이었다. 3대 RPG의 마지막 주자인 웨이스트랜드, RPG의 황금기가 시작된 88년의 그 웨이스트랜드가 폴아웃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RPG의 르네상스가 임박했음을 알리러 왔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귀환인가!
폴아웃의 성공으로 죽어가던 인터플레이는 기사회생했고 그동안 침묵했던 CRPG의 위대한 개척자 울티마도 울티마 온라인으로 CRPG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대변혁을 일으킨다. 이제 위저드리와 마이트앤 매직만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으로 돌아오면 3D쇼크로 선배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잘난 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RPG의 황금기를 불러 일으키는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동안 조용했던 RPG에 서광이 비추는 순간이었다.
웨이스트랜드2 : 리턴 오브 더 RPG
그러나 씹스럽게도 시대의 흐름은 RPG의 편이 아니었다. RPG의 미래가 밝아지려는 그 순간, 재수없게도 딱 그 시기에 PC의 운영체제가 대 변혁을 이루고 만다. 윈도우98이 발매되면서 PC환경은 드디어 기나긴 도스 체제와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 사용이 쉬운 윈도우 체제로 전면적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사실 도스라고 사용에 그렇게 어려운 부분이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모든걸 명령어 타이핑으로 한다는게 분명히 많은 사용자를 막는 장벽의 역할을 했다. 윈도우 98이 나오면서 이 장벽이 무너졌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PC로 유입됐다. 이제 PC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사라졌고 한집에 PC한대는 TV와 같은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더 나쁜것은 윈도우98전의 윈도우95가 게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도스와 윈도우98간의 징검다리를 끊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윈도우95는 과도기적 OS였고 PC의 퍼포먼스를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도 모자른 PC게임의 세계에선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윈도우 환경보다 도스환경을 우선시할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유저들이 윈도우95만을 쓰는데 비해 많은 게임은 여전히 도스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유저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윈도우95로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은 윈도우95용으로만 실행되는 제한된 게임들만 할수 밖에 없었고 도스로 발매된 이전의 모든 RPG는 전혀 즐길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게임을 갈라놓고는 윈도우98로 도스게임을 죽이는 결정타를 날려버린것이었다.
오염물질이 조금씩 계속 들어오면 물은 그것을 정화시켜 같은편으로 만드는게 가능하지만 기존의 물의 양을 가뿐하게 압도하는 엄청난 양이 한꺼번에 들어오게되면 정화는 불가능하다. 그냥 전체가 오염될수밖에 없다. 윈도우98로 인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양의 새로운 PC사용자들은 기존의 도스 게이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제 PC게임계에 'PC게이머'가 사라져 버렸다. PC게임의 역사를 함께 해왔기에 까다로운 기준이나 요구사항을 갖고 있던 기존의 PC게이머의 숫자는 새발의 피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묵살되었다. 절대 다수가 게임을 처음 접하거나 콘솔게임만 하던 사람들로 이전의 PC게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CRPG는 오랫동안 많은 발전을 해온만큼 이미 그당시 RPG들은 뉴비들이 쉽게 건드릴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매뉴얼은 기본이 100페이지에 룰도 복잡했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필요했다. 윈도우95나 98로 유입된 새로운 게이머들은 D&D나 TRPG가 뭔지도 몰랐고 복잡한 룰에 길고 어려운 게임을 하기보단 그저 RTS처럼 배우기도 쉽고 빠르게 끝나는 짧은 호흡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야이 씨발롬아!
한편, 셰터드 스틸이라는 액션게임을 만들었던 캐나다의 듣보잡 제작사 바이오웨어는 '배틀그라운드 인피니티'라는 원대한 MMO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걸 몇몇 퍼블리셔에 들고갔지만 전부 씹혔고 오직 인터플레이 혼자만이 '엔진은 쓸만해 보이니까 이걸로 싱글플레이용 D&D 게임이나 만드쇼' 해서 바이오웨어는 울며 겨자먹기로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원하지도 않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바이오웨어라는 회사는 PC의 다른 RPG메이커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RPG를 만들었다. 90년대 중반에 PC게임계에서 가장 시장이 큰 장르는 FPS와 RTS였고 이미 발전할대로 발전해버린 RPG는 대단히 만들기 까다로운 장르였기에 신규 제작사가 특별한 능력 없이는 손대기가 힘든 장르였다. 예전의 RPG제작사들이나 이제와서 새로 RPG리그에 가입한 제작사들이나 모두 돈을 벌기 위해 RPG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D&D와 RPG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존경심과 이루고자하는 특별한 비전이 있었기에 RPG를 만든것이었다. 그들에게 RPG는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전통적인 RPG를 만들 생각도 없었고 인터플레이라는 퍼블리셔에 의해 바라지도 않은 D&D라이센스에 맞춰 억지로 엔진을 뜯어고쳐야 했던 바이오웨어에게는 RPG장르의 전통을 따르리라고 기대할수는 없는 것이었다.
98년, 윈도우98의 광풍이 몰아치던 해에 D&D와 포가튼렐름의 타이틀을 달고 나온 바이오웨어의 발더스게이트는 전혀 D&D스럽지도, 포가튼렐름스럽지도 않은 괴상하게 왜곡된 모습이었다. 골드박스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D&D라이센스 RPG였음에도 어디에도 그 향취를 발견할수 없었다. 퀘스트는 전형적인 일본RPG식 일방적 전개였고 던전은 그저 경험치 먹는 전투장에 불과했고 룰은 실시간에 턴제룰을 아무런 튜닝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바람에 D&D룰을 쓰면서도 D&D의 전투양상과는 100만 광년쯤 떨어진 괴상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스토리마저 배경과 전설에 비중을 둔 서양 판타지의 느낌이 아닌 캐릭터의 관계중심인 일본RPG를 그대로 빼닮았다.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RPG장르는 당연히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 핵앤슬래쉬였음에도 바이오웨어는 이걸로 퀘스트RPG를 만들었고 배경과의 아무런 인터렉션이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퀘스트RPG는 일본RPG밖에 없었다.
일본RPG라는것은 울티마 초기작을 배낀 드퀘를 다시 파판이 배끼면서 정립된 복제의 복제같은 열화된 장르였다. 울티마를 콘솔에서 즐기기 위해 초딩용으로 단순화 시킨것이 드퀘였고 이것마저 복잡하다고 더 단순화시킨게 파판이었으며 그걸보고 드퀘마저도 4편부터 파판의 노선을 걷게된다. 드퀘팬들이 최고로 꼽는 명작이 드퀘3편인데 이게 딱 파판의 영향없이 울티마 3편까지의 요소를 적당히 카피하고 단순화 시킨 물건이었다. 드퀘3이 88년에 나왔는데 울티마3이 83년 작품이니 무려 5년이나 늦은데다가 88년은 서양에서는 이미 울티마5에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일본RPG는 거기서 발전은 커녕 끝없는 퇴보만 거듭했으며 결코 울티마3의 수준조차 구현한 게임이 없었으니 서양RPG에 비하면 얼마나 후진것인지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서양RPG입장에서는 울티마4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퀘스트RPG가 시작되었다고 볼수있기 때문에 일본RPG는 애초부터 퀘스트RPG도 아닌것이다.
울티마3의 열화 카피
이러한 전형적인 일본RPG의 진행을 답습한 발더스게이는 한마디로 울티마4로부터 발전되어온 그동안의 모든 퀘스트RPG의 특성을 그냥 깡그리 무시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마치 이제와서 피쳐폰이 최신식 휴대폰이라며 출시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90년대 초반에 나왔더라면 온갖 쌍욕을 들어쳐먹으며 사라졌을 이 게임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뿐만이 아니라 정통 D&D식 서양RPG에 CRPG의 구세주로까지 일컬어지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만다. 이는 전적으로 그 전의 RPG를 즐겨보지 못한채 윈도우98로 대거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과 병신같은 게임 저널리스트들의 환상적인 조합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PC용으로 나온 RPG를 발더스게이로 접하고는, 또 게임잡지에서 서양RPG의 부활이니 뭐니 떠들어대니 이게 바로 서양RPG의 전형인가보다 하고 오해를 한것이다.
인터넷에 웹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기존의 대형 잡지들이 수익을 얻지못해 죽어나갔고 RPG에 나름 전문성이 있던 그전의 게임 저널리스트들은 이미 90년대 중반 RPG가 죽었다며 다 빠져나가버렸다. PC게임 저널리즘 전반은 RPG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과 콘솔에서 건너온 병신들이 걸작에 욕을하고 졸작을 명작으로 둔갑시키는 개판 5분후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계획한 악마적인 계락같았다. 잠시 RPG가 집을 비운사이 RPG가 죽었다며 RPG팬들을 내쫓고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사용자를 갈라놓은후 다시 RPG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자 윈도우98로 RPG의 역사를 완전히 단절시킨뒤 새롭게 유입된 게이머들에게 이것이 진짜 RPG라며 처음으로 보여준게 바로 이 거지같은 발더스게이였던 것이다. 이 무슨 RPG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가 뒤에서 암약했다고 볼수밖에 없는 기막힌 우연의 연쇄란 말인가.
이때쯤 되서 과거의 본좌들이 드디어 오랜 수련을 끝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의 귀환은 발더스게이의 성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발더스게이가 없었어도 같은 시점에 나왔을 게임들이었다. 그런데 단지 발더스게이의 상업적 성공 후에 이런 게임들이 나왔다는 이유로 병신들은 마치 이게 발더스게이의 업적인냥 떠들어댔고 그 결과로 발더스게이가 RPG의 부활을 이끈 구세주로 취급받게 된다. 발더스게이 앞에 나온 폴아웃은 완전히 무시한채로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게임들은 발더스게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들이었고 발더스게이가 선점한 윈도우98게이머들은 이 본좌들을 매우 낯설어 했다. 그들은 그저 발더스게이의 후속작과 바이오웨어가 만들 게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RPG를 만드는 서양제작사가 당시에는 바이오웨어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후 몇년사이에 던전RPG는 완전히 망해버렸고 울티마는 급조된 9편으로 스스로 자살해버렸고 인터플레이는 폴아웃의 제작자들을 내쫓음으로서 과거의 위대했던 RPG제작사들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서양RPG의 전통은 끊어질락 말락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고 만다.
일본에서 역수입 개새끼야
발더스게이 이후에 정통 퀘스트RPG로서 유일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은 모로윈드 뿐이었다. 모로윈드야말로 울티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퀘스트RPG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그래픽이나 모드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모로윈드의 게임플레이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베데스다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게임도 발더스게이 같은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했고 상업적으로도 발더스게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공했는데 아무도 모로윈드를 RPG의 왕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발더스게이가 RPG의 왕으로 취급받았고 바이오웨어를 최고의 RPG제작사로 대접했다. 그래서였는지 베데스다는 이후 엘더스크롤4편인 오블리비언을 콘솔로도 발매했고 게임은 그에 걸맞게 퀘스트RPG의 전통을 무시하는, 단지 서브퀘스트가 엄청나게 많은 일본RPG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바이오웨어를 뛰어넘는 최고의 RPG제작사 대접을 받게된다.
바이오웨어와 발더스게이 덕분에 이제 일본RPG가 아니면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A에서 B로 가라고 직접 지시해주는 게임이 아니면, 엔딩까지 손을 잡고 게이머를 모셔가주지 않으면 아무도 플레이 할수 없는 수준까지 게이머들의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이다. RPG를 즐길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RPG를 즐기게 해주자는게 드퀘의 목적이었고 거기서 나온게 일본RPG였으니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의 관심을 끌려면 결국 일본RPG의 길을 걷는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엘더스크롤이 모로윈드에서 룰과 던전을 버리고 퀘스트에 집중했다면 오블리비언에서는 퀘스트마저 포기함으로서 베데스다도 이제 더이상 서양RPG의 적자라고 불릴수 없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RPG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루킹글래스와 함께 서양RPG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는 이렇게 변절하며 퀘스트RPG의 희망 조차도 꺾어버렸다.
울티마에서 시작된 퀘스트RPG의 전통도 이렇게 사망에 이르고 만다. 게이머들에게서 던전RPG가 뭔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것과 마찬가지로 발더스게이에 의해 퀘스트RPG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더이상 게이머들은 RPG에서 던전과 퀘스트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래픽, 액션성, 타격감, 모션, 필드가 얼마나 넓은가, 스토리가 얼마나 인상적인가,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따위의 RPG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차적인 부분으로 RPG의 발전을 논하고 있다. 알맹이는 이미 죽어서 없어진지 오래인데 껍데기만 보면서 발전하네 마네 떠들고 있는 것이다.
D&D로 시작된 CRPG가 D&D라이센스 게임, 그것도 울티마3가 일본으로 건너가 병신화되어 한참후에 돌아온 놈한테 결정타를 맞고 사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코메디스러운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아쉬움에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주체할수가 없다. 발더스게이만 없었더라면... 윈도우98이 도스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엑스박스가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궁극의 RPG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헛소리 같은가? 발더스게이같이 장르를 왜곡시키는 성공작이 없었던 비행시뮬쪽은 현재 그 궁극의 게임들이 나오는 중이다. 나오는 숫자는 적지만 DCS시리즈 같은 비행시뮬은 예전에는 정말 꿈속에서나 볼수 있었던 믿어지지 않는 게임들이다. RPG게이머들의 장르에 대한 이해가 계속 계승 되었더라면 RPG의 미래는 밝았을 것이다.
발더스게이 개새끼 해봐!
발더스게이 개새끼!
윈도우98 개새끼!
엑스박스 개새끼!
그럼 마지막으로 RPG 3대 요소중 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에너지가 다 떨어진 관계로 다음 이시간으로 미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