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7

RPG가 고자라니...말도안돼! 발더스게이 이놈... (5부)

90년대 중반의 RPG가 죽었다는 개소리와 함께 CD롬의 대중화로 용량만 믿고 동영상만 잔득 쳐넣은 쓰레기같은 게임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많은 RPG팬들이 PC게임계에 실망을 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게임이 예전보다 재미가 없어졌다는 얘기가 처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시점이었다. 베데스다나 루킹글래스같은 새로운 제작사들이 2D와 비실시간이던 CRPG를 3D와 실시간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지만 이들만으로는 예전의 전설적인 제작사들의 공백을 메꾸기에는 부족했다.

기다림에 지쳐 다들 희망을 버리고 있을때 스톤키프로 지옥을 갔다온 인터플레이가 폴아웃이라는 의외의 게임을 발매한다. 놀랍게도 이 게임은 거의 10년전 동사의 전설적인 명작 웨이스트랜드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웨이스트랜드의 제대로 된 후속작을 누구나 기다렸었지만 스톤키프로 뻘짓을 하다 망하기 직전까지 간 인터플레이에 10년전의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던 시점이었다.

TRPG적인 룰,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 퀘스트, 비선형적인 스토리 진행, 선택에 따른 결과의 변화등 정식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스템적인 면이 그대로 계승되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배경설정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폴아웃은 단지 웨이스트랜드의 그래픽 업 버전이 아닌 거기에 새로운 시도가 더해진 작품이었다.

CD롬 때문에 동영상으로 쳐바른 쓰레기들 난무

지금까지 RPG의 3대 요소로 던전, 퀘스트, 룰을 언급했지만 사실 CRPG에는 TRPG와 비교했을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RP(Role Play)라고 부르는 캐릭터의 퍼스날리티 연기였다. 3D던전이 가능해짐으로 인해 CRPG는 던전 부문에서는 오히려 TRPG를 능가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퀘스트면에서는 울티마가 심리스 오픈월드에서 비선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서 차별적인 아이덴티티를 획득했고 룰은 이미 웨이스트랜드로 TRPG와 근접한 수준을 보여줬지만 어떤 게임도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에 퍼스날리티를 부여해 가상의 인격을 연기할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던 문제였고 CRPG가 진정한RPG가 되기위해 해결해야할 최우선 과제였음에도 감히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다. 왜냐면 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RP를 제외한 모든것은 어떻게든 미리 준비할수 있지만 인간의 애드립은 인간수준의 AI를 만드는것 외에는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대처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니 대처는 커녕 애드립을 칠 인터페이스조차 만드는게 불가능하다.

폴아웃은 이 정복될수 없는 마지막 남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게임이었다. 준비된 대사지문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RP의 가능성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주관식 키워드 입력 시스템도 같이 제공했기에 객관식 지문선택이 주는 갑갑함도 해소되었다. 대사지문은 항상 같은게 나오는게 아니고 생성한 캐릭터의 능력과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제공되었으며 그에따라 게임의 진행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폴아웃의 스토리가 RP가 의미있을 정도의 밀도가 없었으므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에게 약간의 캐릭터 인격의 선택권을 부여했을지언정 그것이 스토리 전체와 전면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었다. 그래도 어쨌건 폴아웃은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CRPG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준 게임이었다.

97년에 나온 이 폴아웃이라는 게임은 3D 던전에 적응하지 못한 퀘스트RPG팬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게임이었을 뿐 아니라 인터플레이와 같은 전통의 RPG제작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돌아옴을 알리는 반가운 전령이었다. 3대 RPG의 마지막 주자인 웨이스트랜드, RPG의 황금기가 시작된 88년의 그 웨이스트랜드가 폴아웃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RPG의 르네상스가 임박했음을 알리러 왔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귀환인가!

폴아웃의 성공으로 죽어가던 인터플레이는 기사회생했고 그동안 침묵했던 CRPG의 위대한 개척자 울티마도 울티마 온라인으로 CRPG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대변혁을 일으킨다. 이제 위저드리와 마이트앤 매직만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으로 돌아오면 3D쇼크로 선배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잘난 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RPG의 황금기를 불러 일으키는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동안 조용했던 RPG에 서광이 비추는 순간이었다.

웨이스트랜드2 : 리턴 오브 더 RPG

그러나 씹스럽게도 시대의 흐름은 RPG의 편이 아니었다. RPG의 미래가 밝아지려는 그 순간, 재수없게도 딱 그 시기에 PC의 운영체제가 대 변혁을 이루고 만다. 윈도우98이 발매되면서 PC환경은 드디어 기나긴 도스 체제와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 사용이 쉬운 윈도우 체제로 전면적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사실 도스라고 사용에 그렇게 어려운 부분이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모든걸 명령어 타이핑으로 한다는게 분명히 많은 사용자를 막는 장벽의 역할을 했다. 윈도우 98이 나오면서 이 장벽이 무너졌고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PC로 유입됐다. 이제 PC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편견이 사라졌고 한집에 PC한대는 TV와 같은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더 나쁜것은 윈도우98전의 윈도우95가 게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도스와 윈도우98간의 징검다리를 끊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윈도우95는 과도기적 OS였고 PC의 퍼포먼스를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도 모자른 PC게임의 세계에선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윈도우 환경보다 도스환경을 우선시할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유저들이 윈도우95만을 쓰는데 비해 많은 게임은 여전히 도스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유저들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윈도우95로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은 윈도우95용으로만 실행되는 제한된 게임들만 할수 밖에 없었고 도스로 발매된 이전의 모든 RPG는 전혀 즐길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게임을 갈라놓고는 윈도우98로 도스게임을 죽이는 결정타를 날려버린것이었다.

오염물질이 조금씩 계속 들어오면 물은 그것을 정화시켜 같은편으로 만드는게 가능하지만 기존의 물의 양을 가뿐하게 압도하는 엄청난 양이 한꺼번에 들어오게되면 정화는 불가능하다. 그냥 전체가 오염될수밖에 없다. 윈도우98로 인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양의 새로운 PC사용자들은 기존의 도스 게이머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이제 PC게임계에 'PC게이머'가 사라져 버렸다. PC게임의 역사를 함께 해왔기에 까다로운 기준이나 요구사항을 갖고 있던 기존의 PC게이머의 숫자는 새발의 피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묵살되었다. 절대 다수가 게임을 처음 접하거나 콘솔게임만 하던 사람들로 이전의 PC게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CRPG는 오랫동안 많은 발전을 해온만큼 이미 그당시 RPG들은 뉴비들이 쉽게 건드릴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매뉴얼은 기본이 100페이지에 룰도 복잡했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르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필요했다. 윈도우95나 98로 유입된 새로운 게이머들은 D&D나 TRPG가 뭔지도 몰랐고 복잡한 룰에 길고 어려운 게임을 하기보단 그저 RTS처럼 배우기도 쉽고 빠르게 끝나는 짧은 호흡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야이 씨발롬아!

한편, 셰터드 스틸이라는 액션게임을 만들었던 캐나다의 듣보잡 제작사 바이오웨어는 '배틀그라운드 인피니티'라는 원대한 MMO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걸 몇몇 퍼블리셔에 들고갔지만 전부 씹혔고 오직 인터플레이 혼자만이 '엔진은 쓸만해 보이니까 이걸로 싱글플레이용 D&D 게임이나 만드쇼' 해서 바이오웨어는 울며 겨자먹기로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원하지도 않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바이오웨어라는 회사는 PC의 다른 RPG메이커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RPG를 만들었다. 90년대 중반에 PC게임계에서 가장 시장이 큰 장르는 FPS와 RTS였고 이미 발전할대로 발전해버린 RPG는 대단히 만들기 까다로운 장르였기에 신규 제작사가 특별한 능력 없이는 손대기가 힘든 장르였다. 예전의 RPG제작사들이나 이제와서 새로 RPG리그에 가입한 제작사들이나 모두 돈을 벌기 위해 RPG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D&D와 RPG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존경심과 이루고자하는 특별한 비전이 있었기에 RPG를 만든것이었다. 그들에게 RPG는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전통적인 RPG를 만들 생각도 없었고 인터플레이라는 퍼블리셔에 의해 바라지도 않은 D&D라이센스에 맞춰 억지로 엔진을 뜯어고쳐야 했던 바이오웨어에게는 RPG장르의 전통을 따르리라고 기대할수는 없는 것이었다.

98년, 윈도우98의 광풍이 몰아치던 해에 D&D와 포가튼렐름의 타이틀을 달고 나온 바이오웨어의 발더스게이트는 전혀 D&D스럽지도, 포가튼렐름스럽지도 않은 괴상하게 왜곡된 모습이었다. 골드박스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D&D라이센스 RPG였음에도 어디에도 그 향취를 발견할수 없었다. 퀘스트는 전형적인 일본RPG식 일방적 전개였고 던전은 그저 경험치 먹는 전투장에 불과했고 룰은 실시간에 턴제룰을 아무런 튜닝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바람에 D&D룰을 쓰면서도 D&D의 전투양상과는 100만 광년쯤 떨어진 괴상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스토리마저 배경과 전설에 비중을 둔 서양 판타지의 느낌이 아닌 캐릭터의 관계중심인 일본RPG를 그대로 빼닮았다.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RPG장르는 당연히 전투외에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 핵앤슬래쉬였음에도 바이오웨어는 이걸로 퀘스트RPG를 만들었고 배경과의 아무런 인터렉션이 없는 엔진으로 만들수 있는 퀘스트RPG는 일본RPG밖에 없었다.

일본RPG라는것은 울티마 초기작을 배낀 드퀘를 다시 파판이 배끼면서 정립된 복제의 복제같은 열화된 장르였다. 울티마를 콘솔에서 즐기기 위해 초딩용으로 단순화 시킨것이 드퀘였고 이것마저 복잡하다고 더 단순화시킨게 파판이었으며 그걸보고 드퀘마저도 4편부터 파판의 노선을 걷게된다. 드퀘팬들이 최고로 꼽는 명작이 드퀘3편인데 이게 딱 파판의 영향없이 울티마 3편까지의 요소를 적당히 카피하고 단순화 시킨 물건이었다. 드퀘3이 88년에 나왔는데 울티마3이 83년 작품이니 무려 5년이나 늦은데다가 88년은 서양에서는 이미 울티마5에 웨이스트랜드같은 게임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일본RPG는 거기서 발전은 커녕 끝없는 퇴보만 거듭했으며 결코 울티마3의 수준조차 구현한 게임이 없었으니 서양RPG에 비하면 얼마나 후진것인지 감히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서양RPG입장에서는 울티마4로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퀘스트RPG가 시작되었다고 볼수있기 때문에 일본RPG는 애초부터 퀘스트RPG도 아닌것이다.

울티마3의 열화 카피

이러한 전형적인 일본RPG의 진행을 답습한 발더스게이는 한마디로 울티마4로부터 발전되어온 그동안의 모든 퀘스트RPG의 특성을 그냥 깡그리 무시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마치 이제와서 피쳐폰이 최신식 휴대폰이라며 출시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90년대 초반에 나왔더라면 온갖 쌍욕을 들어쳐먹으며 사라졌을 이 게임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뿐만이 아니라 정통 D&D식 서양RPG에 CRPG의 구세주로까지 일컬어지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만다. 이는 전적으로 그 전의 RPG를 즐겨보지 못한채 윈도우98로 대거 유입된 새로운 PC사용자들과 병신같은 게임 저널리스트들의 환상적인 조합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PC용으로 나온 RPG를 발더스게이로 접하고는, 또 게임잡지에서 서양RPG의 부활이니 뭐니 떠들어대니 이게 바로 서양RPG의 전형인가보다 하고 오해를 한것이다.

인터넷에 웹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기존의 대형 잡지들이 수익을 얻지못해 죽어나갔고 RPG에 나름 전문성이 있던 그전의 게임 저널리스트들은 이미 90년대 중반 RPG가 죽었다며 다 빠져나가버렸다. PC게임 저널리즘 전반은 RPG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과 콘솔에서 건너온 병신들이 걸작에 욕을하고 졸작을 명작으로 둔갑시키는 개판 5분후의 모습을 연출하면서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계획한 악마적인 계락같았다. 잠시 RPG가 집을 비운사이 RPG가 죽었다며 RPG팬들을 내쫓고 윈도우95로 도스와 윈도우 사용자를 갈라놓은후 다시 RPG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자 윈도우98로 RPG의 역사를 완전히 단절시킨뒤 새롭게 유입된 게이머들에게 이것이 진짜 RPG라며 처음으로 보여준게 바로 이 거지같은 발더스게이였던 것이다. 이 무슨 RPG를 죽이기 위한 비밀결사가 뒤에서 암약했다고 볼수밖에 없는 기막힌 우연의 연쇄란 말인가.

이때쯤 되서 과거의 본좌들이 드디어 오랜 수련을 끝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의 귀환은 발더스게이의 성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발더스게이가 없었어도 같은 시점에 나왔을 게임들이었다. 그런데 단지 발더스게이의 상업적 성공 후에 이런 게임들이 나왔다는 이유로 병신들은 마치 이게 발더스게이의 업적인냥 떠들어댔고 그 결과로 발더스게이가 RPG의 부활을 이끈 구세주로 취급받게 된다. 발더스게이 앞에 나온 폴아웃은 완전히 무시한채로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게임들은 발더스게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들이었고 발더스게이가 선점한 윈도우98게이머들은 이 본좌들을 매우 낯설어 했다. 그들은 그저 발더스게이의 후속작과 바이오웨어가 만들 게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RPG를 만드는 서양제작사가 당시에는 바이오웨어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후 몇년사이에 던전RPG는 완전히 망해버렸고 울티마는 급조된 9편으로 스스로 자살해버렸고 인터플레이는 폴아웃의 제작자들을 내쫓음으로서 과거의 위대했던 RPG제작사들은 거의 사라져 버리고 서양RPG의 전통은 끊어질락 말락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고 만다.

일본에서 역수입 개새끼야

발더스게이 이후에 정통 퀘스트RPG로서 유일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은 모로윈드 뿐이었다. 모로윈드야말로 울티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훌륭한 퀘스트RPG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그래픽이나 모드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모로윈드의 게임플레이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베데스다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게임도 발더스게이 같은거와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했고 상업적으로도 발더스게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공했는데 아무도 모로윈드를 RPG의 왕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발더스게이가 RPG의 왕으로 취급받았고 바이오웨어를 최고의 RPG제작사로 대접했다. 그래서였는지 베데스다는 이후 엘더스크롤4편인 오블리비언을 콘솔로도 발매했고 게임은 그에 걸맞게 퀘스트RPG의 전통을 무시하는, 단지 서브퀘스트가 엄청나게 많은 일본RPG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바이오웨어를 뛰어넘는 최고의 RPG제작사 대접을 받게된다.

바이오웨어와 발더스게이 덕분에 이제 일본RPG가 아니면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A에서 B로 가라고 직접 지시해주는 게임이 아니면, 엔딩까지 손을 잡고 게이머를 모셔가주지 않으면 아무도 플레이 할수 없는 수준까지 게이머들의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애초에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이다. RPG를 즐길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RPG를 즐기게 해주자는게 드퀘의 목적이었고 거기서 나온게 일본RPG였으니 RPG게이머가 아닌 사람의 관심을 끌려면 결국 일본RPG의 길을 걷는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엘더스크롤이 모로윈드에서 룰과 던전을 버리고 퀘스트에 집중했다면 오블리비언에서는 퀘스트마저 포기함으로서 베데스다도 이제 더이상 서양RPG의 적자라고 불릴수 없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RPG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루킹글래스와 함께 서양RPG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는 이렇게 변절하며 퀘스트RPG의 희망 조차도 꺾어버렸다.

울티마에서 시작된 퀘스트RPG의 전통도 이렇게 사망에 이르고 만다. 게이머들에게서 던전RPG가 뭔지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것과 마찬가지로 발더스게이에 의해 퀘스트RPG에 대한 개념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더이상 게이머들은 RPG에서 던전과 퀘스트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래픽, 액션성, 타격감, 모션, 필드가 얼마나 넓은가, 스토리가 얼마나 인상적인가,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따위의 RPG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차적인 부분으로 RPG의 발전을 논하고 있다. 알맹이는 이미 죽어서 없어진지 오래인데 껍데기만 보면서 발전하네 마네 떠들고 있는 것이다.

D&D로 시작된 CRPG가 D&D라이센스 게임, 그것도 울티마3가 일본으로 건너가 병신화되어 한참후에 돌아온 놈한테 결정타를 맞고 사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코메디스러운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아쉬움에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주체할수가 없다. 발더스게이만 없었더라면... 윈도우98이 도스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엑스박스가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궁극의 RPG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헛소리 같은가? 발더스게이같이 장르를 왜곡시키는 성공작이 없었던 비행시뮬쪽은 현재 그 궁극의 게임들이 나오는 중이다. 나오는 숫자는 적지만 DCS시리즈 같은 비행시뮬은 예전에는 정말 꿈속에서나 볼수 있었던 믿어지지 않는 게임들이다. RPG게이머들의 장르에 대한 이해가 계속 계승 되었더라면 RPG의 미래는 밝았을 것이다.

발더스게이 개새끼 해봐!
발더스게이 개새끼!
윈도우98 개새끼!
엑스박스 개새끼!

그럼 마지막으로 RPG 3대 요소중 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에너지가 다 떨어진 관계로 다음 이시간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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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4

아... 쇼군2 토탈워 쩐다.

드디어 토탈워의 완성을 보는듯 하다. 우선 그래픽이 너무너무 맘에 든다. 사실 토탈워 시리즈가 그래픽 때문에 하는거지 무슨 역사적 고증이나 치밀한 전략때문에 하는게 아닌만큼 그래픽이 죽인다는거에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다. 롬토때는 그래픽에 너무 실망하고 메디블2에서는 그나마 좀 봐줄만 했지만 게임 자체가 완전 병신급이라 토탈워에 기대를 버렸는데 이번에 나온 쇼군2는 정말 내가 토탈워를 처음 접했을때부터 바라던게 대부분 이루어진거 같은 만족감이 든다.

메디블2 하면서 맨날 욕하던게 줌인 그래픽은 존나 신경써놓고 줌아웃시키면 너무 심한 LOD때문에 병신되는 그래픽이었는데 쇼군2는 풀옵으로 돌리니까 줌아웃해도 지형이나 병사나 딱 내가 원하던 수준의 그래픽이 나온다는데서 개감동. 흐그그긓그긓 ㅠㅠ 이걸 보기위해서 얼마나 기다려왔단 말이냐! 거기에 더해 다행스럽게도 게임플레이도 막장이 아니라 꽤 할만한 수준이라는데서 한번 더 감동. ㅠㅠ 메디블2에서 느꼈던 그 병신같음이 싹 사라진 이 개운한 느낌!

병력을 쉽게 보충할수 없고 유지비도 상당해서 이제 미칠듯한 물량싸움에서 벗어나 병력관리에 나름 신경을 써야하고 건물도 한번에 여러개 지을수 있다는것과 전략 자원이 생긴것도 좋고 쓸데없이 다양한 병종이 확 줄어든것도 맘에들고 외교나 전투 AI도 이제야 좀 게임으로서 즐길만한 수준에 온것같다는 느낌도 들고 스킬트리 덕분에 장군의 존재감도 살고 해전도 재밌고 공성전도 할만하고... 우와아앙 기타등등 전부 맘에든다. 약간 아쉬운게 전투시에 너무 빨리 병사가 죽어나간다는건데 덕분에 각개격파 전술이 너무 강해진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사소한 부분이라고 할정도로 전체적 완성도가 훌륭하다.

오랜만에 최신게임에 만족감을 느껴본다. 맨날 그래픽이 좋으면 게임이 병신이고 게임이 좋으면 그래픽이 씹창이고 둘중에 하나라 짜증났는데 둘다 만족되는 게임을 만나니까 아 진짜 무슨 보물을 획득한 기분이다. ㅠㅠ 최대 줌아웃으로 저 아래 꼬물거리는 병사들을 보니 어린시절 삼국지를 하면서 했던 상상이 기억난다. 이게 미래에는 진짜 상공에서 내려보는것 같은 끝내주는 그래픽으로 발전되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던게 지금 바로 눈앞에 실현되어있다. 차이점이라면 그게 코에이에서 만든 삼국지가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에서 만든 토탈워라는것이지만.

일본병신 영국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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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RPG가 죽었다니! (4부)

3부에서는 위저드리에서 시작된 던전RPG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를 이야기했다. 이제 남은 RPG의 두가지 특성, 퀘스트와 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에 앞서 90년대의 분위기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RPG에 있어 별거 없어 보이는 90년대 중후반이야말로 RPG의 운명을 결정하는 커다란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CRPG의 역사와 관련된 글들을 보면 90년대 중반을 RPG가 죽었던 시기라고 주장하고 발더스게이트가 다시 RPG의 중흥을 이끈 게임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90년대 중반에 RPG가 죽은 이유를 설명한답시고 RPG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RPG에 질려버렸다는 식의 개소리를 늘어놓기가 일쑤였고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0년대 초반까지 CRPG는 어떤 장르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온 장르였는데 발전이 없어서 사람들이 지겨워 했다니, 이 무슨 개가 소부랄 핥는 소리인가! 그럼 다른 장르는 왜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지 않는가? 최근 FPS는 10년이 넘게 미칠듯이 따분한 레일슈터만 쏟아지고 있는데 안팔리기는 커녕 점점 더 많이 팔리고있다. 스포츠 게임은 매년 별 발전도 없이 이것저것 약간씩 튜닝해서 내는 수준임에도 항상 폭발적인 판매량을 보인다.

오히려 RPG는 발전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소비자가 그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낙오했다는게 더 맞는 설명이다. 비행시뮬이 너무 발전해서 새로 유입되는 게이머가 팰콘4나 DCS같은 작품들은 대부분 손도 못대고 나가 떨어지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그건 좀더 이후의 90년대 후반 이야기이고 90년대 초반까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던 RPG가 갑자기 90년대 중반에 침묵기를 가지게된 진짜 이유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에게 있었다.

다시 울티마 언더월드가 출시됐던 92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3부에서 이미 했던 이야기지만 90년대 중반의 RPG씬 분위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이때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할수밖에 없다.

우선 울티마 언더월드가 나옴으로 인해 던전에서 더이상 예전의 2D 격자방식을 쓸수 없게 되자 RPG장르에 특별한 애착이 없던 떨거지 제작사들은 다들 울펜슈타인3D를 따라서 제작이 쉬운 FPS로 이동해 버렸다. 기존의 던전 제작 노하우도 FPS에 그대로 쓰일수 있었던데다가 그동안 RPG가 발전해 오면서 점점 스토리가 중요해 졌는데 골치아픈 스토리 문제도 없앨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손쉬운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RPG장르를 지금까지 이끌어왔던 던전RPG제작사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항상 장르를 이끌어온 파이오니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울티마 언더월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여기서 자기들 실력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예전에 하던대로 2D 격자식 던전이나 계속 만들까? 아니면 유행을 따라 콘솔냄새나는 가벼운 던전 슈팅게임이나 만들까? 뜬금없이 나타난 이 신생 제작사에게 80년대부터 꽉 쥐고 있던 최고의 RPG제작사라는 명예를 넘겨준채?

1인칭 턴제 전투의 새로운 진화 위저드리8

우선... 위저드리! 위저드리를 보자! 위저드리가 7편을 내놓은 92년 이후 갑자기 더이상 위저드리는 나오지 않았다. 데이빗 브래들리의 위자드앤 워리어는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2000년에나 나왔고 정식 위저드리 8편은 9년이 지난 2001년에나 나왔다. 위저드리가 7편에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기는 커녕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큰 성공을 했는데 왜 90년대가 통째로 날아가버리는동안 위저드리는 단 한편도 발매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울티마 언더월드를 따라 시리즈를 2D에서 3D로 바꾸는데 따른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 게임을 가지고 무려 8,9년씩이나 만든것이었다. 3D로 대작RPG를 만들기엔 소규모 인원과 1,2년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울티마 언더월드나 시스템쇼크같은 게임들은 던전이 하나뿐인 비교적 소품이었기에 빠른시간에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지 위저드리7편처럼 여러개의 던전과 거대한 필드까지 3D로 만든다는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당시에는 그냥 3D 공간 자체를 구성하는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는데 거기다 10년이 넘게 발전해 오면서 거대해진 RPG의 요소들을 3D로 한꺼번에 플러스 알파까지 해서 옮기려는 시도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전통의 RPG제작자들은 처음으로 3D를 만드니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저 루킹글래스같은 신생 제작사도 했으니 우리도 할수 있겠지 하고 덤벼들었지만 2D로 할수 있었던게 생각처럼 그냥 쉽게 3D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모든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3D기술은 예상을 뛰어넘어 광속으로 발전해서 그동안 만들었던 내용물은 순식간에 시대에 뒤쳐진 그래픽이 되어가니 계속해서 출시를 연기 할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최종 결과물은 동시대의 3D게임에 비해 한참 그래픽이 후달렸으니 3D로의 전환이 기존의 RPG 제작자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짐작할수 있다.

처음으로 3D를 시도함으로서 생긴 이러한 기술적 장애는 위저드리만 겪은게 아니었다. 마이트앤 매직은 5편인 다크사이드 오브 진이 93년에 나왔고 그 이후로 첫 3D인 6편이 나오기까지 5년이나 걸렸다. 한마디로 울티마 언더월드가 던전RPG를 만들던 기존의 제작사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고 이 괴물같은 게임이 몇년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 그동안 훌륭한 2D 던전RPG가 몇작품은 더 나왔을게 분명했다.

한국에선 힘센이끼로 유명한 마이트앤 매직 6

그럼 던전RPG 말고 다른쪽은 왜 90년대 중반에 갑자기 침묵했을까? 울티마의 경우는 1인칭도 아니었고 던전RPG도 아니었으니 울티마 언더월드와 상관없이 당당하게 94년에 2D로 8편을 낼수 있었지만 이후 울티마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9편은 계속 연기가 되어 99년에야 급조되어 나올수 있었다. 울티마 본편으로 따지면 8편과 9편에 긴 공백기가 있었던 셈이 되지만 사실상 MMORPG의 시초라고 할수있는 울티마 온라인이야말로 8,9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울티마의 혁신성을 이어간 진정한 본편이나 다름없는 초 대작이었다.

이런 엄청난 물건을 만드는데 짧은 시간이 걸릴리가 없고 몇년씩이나 잡아먹는건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88년에서 92년 사이에 너무나 많은 RPG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다 보니 다들 마치 대작 RPG가 1년에 몇개쯤은 나오는게 당연한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은 그때가 비정상이라고 할수 있는 시기였는데 말이다.

던전RPG가 침묵하는 사이에 퀘스트RPG의 대명사라고 할수 있는 울티마 마저도 몇년간 보이지 않게 되자 다들 여기저기서 RPG가 왜 안나오냐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당장 하나라도 더 RPG가 나와야할 이런 급박한 상황하에서 RPG 4대 제작사중 마지막 남은 인터플레이 마저도 당시에는 뻘짓중의 개뻘짓을 일삼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진짜 가짜세계 울티마 온라인

인터플레이는 드래곤 워즈를 출시한 이후 던전마스터 형식의 RPG제작을 시도했는데 던전마스터와는 다르게 1인칭 2D 격자 이동시에 딱딱 끊겨서 이동하는게 아니라 중간에 프레임을 넣어 부드럽게 격자를 이동하는 방식을 만들려고 했다. 이는 원래 인터플레이의 첫 작품인 바즈테일에서도 선보였던 모습이지만 그때는 단지 전진시에만 그렇게 보였을뿐 90도 회전시에는 그렇게 만들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2D로 진짜 3D처럼 회전시에도 부드럽게 스크롤 되는 던전RPG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90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9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였지만 기술적 문제로 계속 연기 되기 시작했고 이 게임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붇느라 그동안 제대로 다른 RPG를 만들수도 없었다. 그런데 92년에 진짜 3D 던전RPG인 울티마 언더월드가 나오면서 이 프로젝트는 이제 더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병신같이 계속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해 버리는 큰 실수를 하고 만다.

프로토타입이 예상보다 인상적이자 점점 욕심이 커져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젝트의 규모는 방대해져갔다. 몇명으로 시작했던 제작진이 나중에는 200명으로 불어났고 풀모션 비디오까지 동원해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팬들의 기대는 점점 커져갔고 인터플레이는 그동안 번 돈을 여기다 다 쏟아부었기에 그만둘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사활을 건 이 대작은 스톤키프라는 이름으로 95년에 발매되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이미 FPS가 판을 치고 울티마 언더월드가 나온지가 옛날이고 엘더스크롤 같은 게임이 있는 상황에서 부드럽게 스크롤이 된다고 하지만 던전마스터 스타일은 엄청난 시대착오적 뻘짓이었다. 단지 외적인 형식뿐만 아니라 게임내의 컨텐츠도 도저히 RPG명가인 인터플레이가 목숨걸고 만든 게임이라고는 볼수가 없었다. 그 옛날 던전마스터 보다도 못한 그냥 그저그런 평범한 게임이었다. 상업적으로도 완전 실패를 했고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이딴걸 만들었냐고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들어 쳐먹었다.

스톤키프같은 평범한 게임을 만드는데 5년이 걸렸지만 이후 폴아웃 같은 걸작을 2년만에 만든것을 보면 스톤키프만 없었어도 그 기간에 인터플레이는 꾸준하게 좋은 RPG를 만들었을 회사였다. 결과적으로 스톤키프 때문에 90년대 중반을 그냥 쌩으로 날려버린 뻘짓을 한 것이다.

인터플레이에게 있어 스톤키프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스톤키프의 실패로 회사는 재정적으로 휘청거렸고 이후로 질높은 RPG를 만드는데는 별 관심이 없이 돈, 돈 오로지 돈만을 외쳐대는 전형적인 게임 퍼블리셔로 돌변했다. 다음 작품인 폴아웃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할수 있었고 발더스 게이트의 커다란 상업적 성공이 없었으면 그대로 무너졌을수도 있었다.

아마데우스... 아니 인터플레이의 레퀴엠

그동안 RPG를 이끌어오던 가장 대표적인 4개의 제작사가 이렇게 여러가지 사정으로 예전처럼 빠르게 게임을 출시할수 없었으니 당연히 90년대 중반 RPG의 공백기가 생길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코 RPG가 안팔려서 안나온게 아니고 RPG가 죽은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야 말로 번데기가 나비가 되기위해 허물을 벗는 고통을 겪듯 RPG가 새롭게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진통의 시기였는데 성질급하고 멍청한 게임 저널리즘 전반은  RPG 사망 선고를 내려버리고 게이머들은 앵무새처럼 RPG가 죽었다고 떠들어 댔으니 이 어찌 개좆같은 상황이 아니었겠는가.

사실 3D 기술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회사들은 오히려 이 시기에 물만난 물고기처럼 RPG를 만들고 있었다. 루킹글래스는 꾸준하게 울티마 언더월드를 발전시켜갔고 원래 RPG제작사가 아니었던 베데스다는 94년에 아레나, 96년에 데거폴을 출시했고 다이나믹스도 크론도의 배신자와 안타라의 배신자를 만들었다.

90년대 중반하면 특히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빼놓을수가 없는데 이 엘더스크롤 시리즈야말로 그동안의 모든 RPG의 발전상을 한꺼번에 집약해서 발전시킨 토탈패키지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명작 RPG들은 던전,퀘스트,룰 이라는 3가지 커다란 특징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왔지만 그중 어느 한가지나 두가지 정도를 중점적으로 사용했을뿐 3가지 특징 전부를 모두 구현한 게임은 없었다. 보통 던전RPG는 비선형 퀘스트 쪽이 약했고 퀘스트RPG는 던전쪽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베데스다의 데거폴은 위저드리같은 미칠듯이 빡치는 던전뿐만 아니라 울티마 식의 가상세계 구현에 스토리를 중시하는 비선형 퀘스트구조까지 가졌고 웨이스트랜드 뺨치는 복잡한 TRPG식 룰까지 포함시켰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로그라이크의 랜덤생성 요소를 게임 전반에 도입해 엄청난 숫자와 크기의 맵, 던전, 도시, NPC, 퀘스트등등 지금까지 RPG가 거쳐온 모든것을 한 게임안에 구현하면서도 각각의 요소가 적당히 타협한게 아닌 아무도 시도한적이 없을거같은 극단으로 치닫는 코어함으로 구현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3D로!!! 겨우 96년도에!!!!!! 으아아아!!!!!!!!!!!

그건 정말로 미친짓중의 미친짓이었다. 목표가 너무나 무모했기에 버그는 그 어떤 게임도 감히 범접할수 없는 수준이었고 밸런스같은건 애초에 조절할수도 없었다. 게임이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에 짜임새같은건 개나 줘버렸고 군데군데 엉성함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데거폴이 CRPG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버그때문에 중간에 때려쳤지만 아직도 데거폴보다 더 야심적인 게임을 본적이 없고 데거폴이야말로 CRPG가 향했어야 할 올바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친짓 of 미친짓, 그러나 위대했던 미친짓

루킹글래스와 베데스다야말로 고전 3대 RPG의 유산을 물려받아 90년대에 RPG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던 진정한 후계자들이었고 RPG는 결코 죽지않고 발전해 나간다는 희망을 안겨준 쌍두마차였다. 이런 위대한 제작사들을 두고 어떻게 감히 90년대 중반이 RPG가 죽었던 시기라고 주장할수 있단 말인가. FPS처럼 갯수만 많이 나오면 장땡인가? 그당시 그렇게 쏟아져 나오던 FPS중 둠과 듀크뉴켐3D 말고 현재까지 기억되는 게임이 있기는 한가? 90년대 중반 흥했다는 FPS보다 오히려 죽었다는 RPG에서 더 의미있는 게임이 많았다. 어디 내 앞에서 90년대 중반에 RPG가 죽었다는 개소리를 다시 한번 해보라고!!!

그러나 이 개소리는 그 다음의 개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발더스 게이트가 죽었던 RPG를 부활시켰다는 개소리이다.

그것이 왜 개소리냐면...

그건 다음 이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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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던전RPG가 죽었슴다 ㅡㅡ; (3부)

2부 마지막에서 언급했듯이 88년부터 92년은 정말로 특별한 시기였다. CRPG장르의 명확한 특징이 확립되어가자 경험이 없던 회사들도 여기저기서 RPG를 출시했으며 그동안 RPG를 만들던 제작자들은 경험과 실력이 드디어 절정에 달해, 이 시기에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냈던 것이다.

이때 나온 울티마는 하나하나가 최고의 작품들이었고 위저드리는 6편과 7편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뤄냈으며 인터플레이는 웨이스트랜드, 드래곤 워즈 뿐만 아니라 반지의제왕 RPG도 만들었고 마이트앤 매직은 3편으로 시리즈의 정점을 찍었다. 마인드크래프트사는 울티마에 맞먹는 매직캔들 3부작을 내놓았고 SSI가 마침내 모든 PC게이머들의 꿈이었던 정식 D&D라이센스를 받아 골드박스 시리즈를 공장돌리듯이 찍어댔고 마이크로프로즈같은 RPG와 전혀 관계없는 회사에서도 다크랜즈같은 명작을 만들었으며 웨스트우드는 던전마스터 형식을 빌어 비홀더의 눈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모두가 그동안의 던전, 퀘스트, 룰이라는 세가지 핵심요소의 발전을 그대로 물려받아 더욱 발전시킨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이처럼 신규 제작사던 잔뼈가 굵은 기존의 제작사던 어디서나 높은 품질의 RPG가 튀어나왔고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머들은 이를 놀랍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앞으로는 더 많은 작품이 나올것이고 더 커다란 발전이 있을것이라는 희망에 아무도 의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꿈의 실현, 공식D&D 게임 풀오브레디언스

이 아름답고 찬란한 시기는 아쉽게도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1992년 말에 갑자기 게이머들과 제작자들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CRPG를 하던 사람들이라면 그동안 누구나 꿈꿔오던, 4방향 격자식 가짜3D에서 벗어난 부드럽게 스크롤되는 진짜 3D던전 게임이 거의 동시에 두작품이나 나왔던 것이다.

루킹글래스 테크놀러지의 울티마 언더월드와 이드소프트의 울펜슈타인3D는 다른 장르이면서도 공통 조상을 가진 게임이었다. 먼저 울티마 언더월드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것 같은 미래의 게임이었다. 사실상 기술적으로 거의 4년 뒤에나 나왔던 퀘이크에 필적할만 했다. 최초로 폴리곤에 텍스쳐를 입혔을뿐 아니라 동적 라이팅이 가능했고 무려 중력가속도까지 존재했다. 같은 시기에 나왔던 울펜슈타인3D는 이에 비하면 마치 10년전 게임같아 보일정도로 압도적인 기술력이었다. 갑자기 몇년은 그냥 스킵해버린것같은 혁명적인 발전을 보고 게임제작자들은 아연실색했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2D그래픽으로 RPG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울티마 언더월드는 단지 기술적으로만 뛰어났던 게임이 아니었다. 그동안 RPG는 던전이라는 요소에서만큼은 여전히 81년에 나왔던 위저드리1편에서 의미있는 진보를 하지 못했다. 아무리 실시간 요소를 도입하고 새로운 퍼즐과 함정을 구상해봐도 누구도 그 4방향 격자의 뚜렷한 한계와 패턴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울티마 언더월드는 완전한 3D공간을 구현함으로서 드디어 그 기나긴 격자식 던전의 속박을 풀어버리고 진정으로 커다란 진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제 던전 제작에 있어 어떠한 한계도 없는 완전한 자유가 부여되었다.

한마디로 울티마 언더월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위저드리, 위저드리의 진정한 직계자손이라고 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RPG의 미래가 찾아왔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될 터였다. 그러나 위저드리때와는 다른 문제점이 한가지 있었다. 위저드리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단순한 물건이었다. 누구나 쉽게 구현할수 있었고 어떻게 던전을 구성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되었다. 하지만 울티마 언더월드는 던전 구성의 무한한 자유에 대한 댓가로 엄청난 기술적 장벽을 주었다. 실제로 이 미래에서 온 게임을 아무도 흉내내지 못했다. 게임업계 최고의 3D기술력을 지녔던 베데스다만이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94년에야 겨우 엘더스크롤: 아레나에서 울티마 언더월드와 같은 진짜 3D던전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울티마 언더월드와 동시기에 등장한 울펜슈타인3D는 마치 위저드리가 콘솔 슈팅게임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같은 게임이었다.  울티마 언더월드가 위저드리로부터 10년간 쌓여왔던 그동안의 모든 던전구성의 발전상을 그대로 물려받고 한단계 성숙한 성인의 모습이었다면 울펜슈타인3D는 그동안 쌓아온 부모의 DNA정보를 모두 버리고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정보만 남긴 태아와 같은 원시적인 모습이었다. 콘솔게임의 전형적인 스테이지 클리어 방식에 퍼즐이라고는 그저 통로와 방으로 만든 미로에서 몇몇 비밀문과 열쇠를 찾는 정도에 그쳤다. 울티마 언더월드는 거기에 더이상 무언가를 더하기에는 엄청난 실력이 필요해 보인데 반해 울펜슈타인3D는 여백이 너무많아 발전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백지처럼 보였다. 게다가 3D처럼 보였지만 실은 위아래가 없는 불완전한 2.5D의 형태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도 울티마 언더월드보다 훨씬 구현하기에 수월했다.

이 선택의 순간에 게이머들과 제작사들 모두 울펜슈타인을 선택하고 만다. 게이머들은 강렬한 몰입감을 주는 정교하고 복잡한 던전RPG의 정수가 아닌 그저 별생각없이 미로에서 총이나 쏴대면서 열쇠나 찾는 닌텐도식 심심풀이 땅콩같은 게임에 더 관심을 가졌고 제작사들은 어렵지만 의미있는 길에 도전하기 보다는 돈벌기에 쉽고 빠르지만 금방 잊혀질 길을 선택해 버렸다. 던전RPG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려는 순간에 콘솔게임과 피가 섞인 사생아가 나타나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CRPG역사상 처음으로 장르가 퇴보한 순간이었고 PC게임의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울펜슈타인3D가 던전RPG를 완전히 박살낸 장본인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자체가 절반은 위저드리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울펜슈타인3D의 제작자였던 존 카멕은 게임은 단순해야한다는 닌텐도식 철학을 가졌지만 그도 어쩔수없는 1세대 PC게임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당시 게임 프로그래머중에 위저드리와 울티마를 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울펜슈타인3D를 만들기 전에는 위저드리 형태의 던전RPG도 한번 만든적이 있을 정도로 RPG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 울펜슈타인3D가 위저드리의 향취를 간직한것은 필연이었다.

초단순 실시간 위저드리

마침내 울펜슈타인3D의 후속작인 둠이 엄청난 상업적 대성공을 거두고 FPS라는 새로운 장르명까지 부여받자 본격적으로 둠클론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곧 처음 위저드리 클론들이 그랬듯 그저 둠과 같은 수준으로는 주목을 끌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들 둠에 뭔가를 더 첨가하려고 했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던전의 발전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이게 왠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콘솔게임의 범람인가 생각했지만 점점 더 던전 구조가 복잡해지고 사실적이 되어가면서 던전마스터, 던전의 신이라고 불릴만한 던전RPG의 최고 제작자였던 데이빗 브래들리까지 사이버메이지같은 FPS제작에 참여하는등 FPS장르는 최소한 던전 구조에 있어서만큼은 예전의 던전RPG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절망속에서 희망이 싹트고 있던 그때, 20세기말에 그것이 등장했다. FPS끝판왕 하프라이프였다. 하프라이프는 FPS에 스토리를 결합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스토리란것은 특성상 선형적이다. 사건은 시간순으로 일어나며 효과적인 서술엔 정해진 순서가 필요하다. 반면에 던전은 그곳에 들어온 사람을 혼란시키고 출구와 입구를 잃어버리게 만들어 그안에서 사망하게 만드는게 목적이므로 선형성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이것이 바로 PC게임이 그토록 스토리와 잘 섞이지 않았던 이유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하프라이프는 아예 던전 자체를 없애고 일자 통로를 만듦으로서 스토리텔링의 골치아픈 문제를 회피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회피'였다. '게임'과 '스토리' 두가지 재료를 놓고 서로 잘 섞이지 않으니 '게임'을 버린것이었다.

알다시피 하프라이프는 엄청난 주목을 받고 상업적 대성공을 이룬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어디에도 PC게임의 영향은 남아있지 않았다. PC게임의 영향인 던전을 버림으로서 완전한 콘솔게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어떻게 하면 더 복잡하고 재밌는 던전을 만들지 고민하던 FPS제작사들은 전부 다 방향을 바꾸어 하프라이프를 따라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운 스토리를 보여줄지, 더 화끈한 영화적 연출을 보여줄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제작사들은 눈치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보다 스토리를 더 좋아한다는것을. 좋은 게임을 만들게 아니라 좋은 스토리를 만들고 그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면 그만이라는것을. 던전RPG의 두개의 갈림길 - 울티마 언더월드와 울펜슈타인3D - 그중에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한쪽은 하프라이프라는 게임 때문에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FPS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던전RPG를 죽이기 위하여

던전RPG의 남은 한 줄기인 울티마 언더월드를 만들었던 루킹글래스 테크놀러지는 혼자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나머지 이 새로운 던전RPG 형식을 홀로 외롭게 발전시킬수 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 던전RPG였던 시스템쇼크는 NPC와의 대화가 아닌 이메일과 일지를 통한 스토리텔링과 사이버스페이스를 게임진행에 훌륭하게 결합하였고 잠입FPS의 효시인 씨프 1편과 2편은 실시간 던전RPG가 다다를수있는 궁극의 지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루킹글래스만 그냥 혼자 저 높은 하늘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래에서 수많은 FPS들이 아무리 멋진 던전을 만들려고 발버둥을 쳐도 92년에 나온 울티마 언더월드 수준조차 이르지 못했다. 게임역사상 유래가 없는 창조성과 혁신성에 기술력까지 지닌 이 갑툭튀한 게임제작사는 찬란하게 빛나는 신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클리셰처럼 지상의 인간들은 천상에서 내려오는 신의 축복을 발로 걷어 차버린다. 재정난 때문에 2000년 씨프2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때쯤에는 PC게임계도 완전히 망조가 들어 좋은 게임이 안팔리는건 둘째치고 게임 저널리즘의 수준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추락해 좋은 게임이 뭔지도 판단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안팔리더라도 좋은 게임과 훌륭한 제작사를 제대로 평가라도 해줬는데 이 멍청한 게임 저널리스트들은 루킹글래스의 사망이 어떤 의미인지 조차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PC게임만의 비극이 아니라 게임계 전체의 비극이었다. 루킹글래스는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근본적으로 발전시킬 창조력과 동력을 가진 유일한 회사였다. 메시아를 죽여놓고는 그것이 메시아인줄도 모르고 후회도 없고 주목도 없었던 것이다.

하프라이프로 인해 FPS가 끝장난 상황에서 던전RPG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 홀로 그 길을 걸어간 마지막 제작사 루킹글래스 테크놀러지의 사망은 곧 던전RPG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던전RPG 진화의 최종단계 씨프

그래도 부자가 망하면 3년은 간다고 루킹글래스가 해체되면서 그 인력들은 이래셔널 게임즈와 이온스톰 오스틴 두 회사로 쪼개지게 된다. 이래셔널 게임즈는 시스템쇼크2를 만들면서 루킹글래스의 적자인것처럼 보였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타락하게 된다. 게임 제작자들 중에는 훌륭한 능력과 이상을 가졌지만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상업적인 실패를 하게되면 완전히 과거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상업적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대표적인 예가 베데스다의 토드 하워드와 이래셔널 게임즈의 켄 레빈이고 바이오쇼크는 바로 그런 결과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바이오쇼크는 쉽고 간단하지만 확실히 던전은 존재한다. 하프라이프 이후로 죽어버렸던 던전을 다시 부활시켰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이래셔널 게임즈가 앞으로 여기서 더 던전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전무하다. 발전시킬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스템쇼크2같은걸 만들었던 회사가 바이오쇼크같은 퇴보한 게임을 만들리가 없기 때문이다.

워렌스펙터가 수장으로 앉은 이온스톰 오스틴은 데이어스 엑스로 던전RPG와 스토리를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것처럼 보였으나 2편에서는 완전히 퀘스트RPG로 방향을 틀어버렸고 2편의 상업적 실패로 회사는 망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루킹글래스의 잔재 조차도 사라져갔다.

현재 던전RPG를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경력에서 던전빼면 시체인 '던전마스터' 데이빗 브래들리 한사람 뿐이다. 위저드리 5,6,7을 만들었던 그는 궁극의 던전RPG를 만들기 위해 서택을 빠져나와 위저드앤 워리어라는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풀3D를 시도하는데 따른 기술적 난관으로 게임은 예상보다 한참 늦은 2000년에나 나왔고 이미 던전RPG가 죽어버린 PC게임계에서 상업적 실패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매우 부당한 욕을 먹는다.

필생의 역작이 욕을 먹자 브래들리는 이성을 잃고 외쳤다. '그래 다 때려치고 철저하게 니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주겠어!' 또다른 비극적인 타락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5년만에 나온 던전로드는 단지 실시간 액션 전투로 바뀌었을 뿐 그의 말과는 다르게 매우 전형적이고 괜찮은 던전RPG였다. 당연히 또다시 상업적 비평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현재 던전로드2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쓴맛을 보고도, 희망이 없어도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던전RPG의 길을 지키고 있는 이 위대한 제작자만이 현재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정통 던전RPG 최후의 명작 위자드앤 워리어

RPG에서 던전은 빠질수 없는 요소이다. 앞으로도 아무리 쓰레기같은 RPG가 나온다고 해도 던전이 없는 RPG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이름에 걸맞게 위험과 공포와 비밀이 가득찬 던전스러운 던전일지 아니면 그냥 괴물과 아이템이 나오는 통로에 불과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다들 알것이다. 이제 아무도 던전이 주는 재미를 기억하지 못한다. 게임을 즐기는 세대가 바뀌는 동안 던전이 주는 재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CRPG를 최초로 정의했던 위저드리의 커다란 축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럼 남은 두가지 축, 퀘스트와 룰은 아직 살아있을까?

그건 다음 이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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