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3

사악한 편에서 게임을 하고 싶다.


옛날부터 엑스컴을 하다보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외계인으로 플레이하고 싶다."
외계인 소탕이 아니라 외계인 입장이 되어 지구인을 납치하고 고문! 강간!실험! 따위를 하면서 지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이런 사악한 편에서 플레이하는 게임이라면 대표적으로 던전키퍼가 떠오른다. 던전을 터는 모험가 파티가 아닌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를 다스리는 게임이지만 하다보면 이쪽이 사악한 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어딜봐서 던전터는 모험가 파티가 선의 편이란 말인가. 좋게 말해서 모험가지 실은 남의 물건 훔쳐가는 도굴꾼일 뿐이다. 던전키퍼는 그냥 몬스터의 스킨만 입힌것일 뿐이지 실은 전혀 악의 입장이 되는 게임이 아니다.

게다가 난 게임하면서 방어의 입장에 서는게 정말 진저리나도록 싫다. RTS를 하다보면 꼭 한번씩은 나오는 30분동안 마을을 지켜라! 따위의 미션이나 FPS를 해도 헤일로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게임에 들어가 있는 30분동안 버텨라! 따위의 미션을 볼때마다 오바이트가 쏠린다. 아무런 당위성없이 30분동안이나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짓을 초조하게 시계나 바라보면서 반복한다는것은 게임이 아니라 고문 그 자체이다.

게임에서 방어가 의미가 있을때는 훗날의 공격을 위해서 방어할때 뿐이다. 방어가 끝나고 그동안 모은 힘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한꺼번에 무너트리는 카타르시스가 있을때만이 방어라는 고된 작업을 참고 견디게 할수 있는 것이다. 엑스컴이 명작인 이유도 방어만 하다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방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플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RTS나 FPS 싱글 캠페인의 방어미션은 그냥 다음 미션으로의 진행을 위한 의미없는 노가다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엑스컴을 하면서 외계인으로 플레이하고 싶다는 욕구에는 단순히 사악한 편이 되고 싶다는 욕구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방어가 아닌 공세의 입장이 되고 싶다는 욕구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어렸을때부터 상상해봤던 게임들이 이제는 이미 실현된게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언젠가 꼭 나오길 기대하는 게임이 있으니 바로 세계를 구하고 지키기 위한 RPG가 아닌 세계를 공격하고 정복하는 RPG이다. 

세계를 지키기 위한 RPG는 기본 전제 부터가 참 재미가 없다. 세계를 공격하려는 대상만 죽이면 끝나는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한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별로 생각이나 고민할 꺼리가 없다. 반면에 세계를 정복하려는 입장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엄청난 자유와 가능성이 생겨난다.

방어는 how 보다 what 이 중요하지만 정복사업엔 how가 가장 중요하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임무에 임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능동적인 플랜이 필요한 것이다. RPG이면서도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플레이어의 행위에 세계 전체가 영향을 받고 변화해야만 한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걸 '저지르는' 입장이 되고 세계의 선한 사람들이 분노하여 플레이어를 막으려고 달려드는걸 구경하면서 낄낄거리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음... 절대로 안나올것 같다.

댓글 21개:

  1. 물건너 음란물에는 이런게임이 꽤 많죠.

    게다가 애초부터 편협한 시장이라 되려 천편일률적인 메이저게임보다 재밌는 시도가 훨씬 많아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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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익명 / 그런가요? 제가 해본 몇몇 야겜들은 게임이라기 보단 그냥 분기있는 소설에 가깝던데 그쪽에도 주옥같은 물건이 있나보군요. 추천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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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를들면 초고전 귀축왕란스같은것. 정복을 해가는거 자체도 재밌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다양하고 튼튼한 상대방의 방어선을 속임수/협박 등으로 뚫고 나가는 전개가 재밌습니다. 각종선택에따라 등장인물의 운명도 크게바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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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 그런데 rpg가 아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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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익명 / RPG가 아니면 어떤가요. 재미있을거 같은데요. 기억해놨다가 꼭 한번 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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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윈트] 제 생각하고 정말 같네요. 영속성을 중요히 생각하시는 듯.. 저도 시간제한은 정말 질색입니다. 그게 방어건 공격이건간에.. 공격도 시간 정해놓고 하는건 무슨 꼭두각시 놀음도 아니구요.
    퀘스트에도 시간제한 있는건 좀 답답하죠. 그래서 사실 첨에 폴아웃1의 시간제한 플롯을 보며 실망했지만, 일단 시간 지킨 후의 자유가 있었기에 괜찮았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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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윈트 / 저는 공격처럼 능동적인 행동이 가능할때 시간제한은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시간제한이 있으면 경우의 수를 전부 해볼수가 없으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요즘 RPG는 퀘스트에 시간제한있는게 없어서 많이 아쉬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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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적으신대로 높은 자유도가 필수가되어

    시뮬게임이 되지않을까요 ?


    히틀러가 되보는것말고 제대로 체험하긴힘들듯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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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익명 / 그렇죠. 우선 시뮬레이션 요소는 필수적으로 들어가겠죠. 세계가 다이나믹하게 반응을 해야하니까...

    그런데 플레이어가 계획한 모든 방법이 다 가능할 필요는 없을거 같아요. 답은 몇개가 정해져 있지만 선택지를 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관식처럼 뭐가 가능한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는 먼저 어떤게 가능할지 세계를 탐험하면서 고민을 하겠죠.

    평범한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면 평화로운 왕국에서 고대의 악신을 봉인한 무덤 같은데를 찾아가서 부활시킨다거나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위장 취업을 해서 왕의 암살을 노린다던가 전염병을 퍼뜨린다던가 괴물을 양산해서 군대를 조직한다던가 뭐 이런 몇몇 방법들이 가능하도록 미리 만들어놓았지만 플레이어에게는 미리 가르쳐주질 않음으로서 스스로 자기가 고안한 계획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거죠.

    예를들면 어떤 마을에 들려서 대화를 했더니 뒷산에 고대의 악마가 잠들어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더라 뭐 이런 정보를 얻으면 플레이어는 이걸 이용해서 정복을 해볼까? 하고 생각을 하는겁니다. 그래서 실행을 하려고 하면 막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또 방해하기 위해서 다른 마을에 전염병을 푸는 계획을 양동작전으로 쓰기도 하고...

    안나올거 같으니까 그냥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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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parkhwan)

    주인장님은 정말 멋진분이신듯.. 저 또한 항상 엑스컴을 하면서 뮤톤들을 조종하여 난장판을 피워보고싶은 욕구에 사로잡혔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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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parkhwan /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본능적인 파괴욕구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멋진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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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http://www.gamespot.com/destroy-all-humans/platform/xbox/

    이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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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익명// ㅎㅎㅎ 그 게임 뒷사연이 좀 재밌어요. 거기 개발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슈팅 게임 만드는 데 지쳐가지고 "더이상 사람이라곤 모조리 죽이는 게임 만들기 싫어!"하고 뛰쳐나갔어요.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 그 말에서 영감을 얻어 Destroy All Humans...라는 게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뛰쳐나간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http://en.wikipedia.org/wiki/Matt_Ha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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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익명 / 제가 생각하는건 좀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한 게임이지만 이것도 나름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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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오버로드. 악의 입장에서.. 흠.. 헌데 착한 놈펭이가 더 착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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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저는 악의 축의 편에서 하는건 그다지 취향이 아닌지라
    뉴베가스도 시저의 군단은 한번만 해봤고 알파 프로토콜도 악하게 플레이하는것도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시도는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네요 ㅎㅎ
    다만 저 둘은 악의 축으로 진행하는것도 상당히 매력적이라 끌리긴 합니다.
    시저의 군단은 좀 아쉬운 점이 많다지만 다른 축에서 진행하는 같은 이벤트의 스토리 진행이 흥미롭기도 하고 특히나 하얀 장갑은 시저축에서든 반대축에서든 재밌습니다.

    악의축 하니 저는 트론의 꼬붕이란 게임이 그런 축에서 진행하던 게임이었네요.
    물론 좀 아기자기한 만화의 좀 부족하고 착한 악당이라 그런게 좀 덜하긴 하다지만
    진행 자체가 좀 웃깁니다 ㅋㅋㅋ 미니게임들 이어붙인 게임이긴 하지만 그런 미니 게임들이 은행을 턴다던가 그런 와중에 부속으로 부하들 시켜 경찰자 부품을 해체시켜 부품으로 쓰거나 판다던가 민가를 털게한후 다 털면 박살내서 돈을 더 턴다던가 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ㅋㅋㅋ 그외에 목장을 습격해 가축을 납치해간다던가 ㅋㅋㅋ
    부하들도 각자만의 개성이있고 대화가 달라서 그걸 힌트로 강화시킬 수단을 찾아줘서 강화시킨다던가 하는 재미가 있던 게임이었죠. 물론 콘솔게임에 막간에 낸 게임이라 짧은 게임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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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충 찾아보니까 록맨 스핀오프 비슷한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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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록맨시리즈 중에서 대쉬시리즈의 외전입니다.
      1편과 2편 사이에 낸거라 2편의 데모도 있었다는거 같구요.
      외전에 막간에 낸거라 볼륨은 좀 아쉽습니다. 한번 깬건 다시 못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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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http://www.youtube.com/watch?v=SNeod9CPUzQ
    엌ㅋㅋ 악당이 되서 아지트를 건설해 정의의편과 싸우는 게임이 있군요 ㅋㅋㅋ
    그런데 일본어에 한자도 복잡해보여 못하겠네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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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엑스컴이 명작인 이유도 방어만 하다 끝나는 게임이 아니라 방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플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캬아 통찰력!!! 요즘 제노너츠 미친듯이 즐기며 절실히 동감합니다.
    초반에 아군 막 박살나가며 신병 다급히 충원하고, 그러다가 외계인 잡아다 조져서 기술 얻고 이러면서 화성까지 날아가는 대반격의 서사시가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병사들 이름은 순전히 랜덤이고, 무슨 특정 캐릭터라던가 인물의 대사라던가 이런게 전혀 없는 게임인데도 자동적으로 플롯이 생기는게 놀랍죠. "내가 스토리를 만들어간다"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어떤 RPG나 어드벤쳐보다도 더 뛰어난 듯 합니다. 제 게임 경력이 일천하지만, 엑스컴(그러니까 제노너츠도)은 최고의 게임 스토리를 갖고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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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략게임이 그런식의 깜짝 전환을 보여주면 굉장히 쇼킹하게 느껴지죠. 애초에 전략게임에서 뭔가 대단한 스토리를 기대하면서 하지는 않아서 그런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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