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25

게임이 게임을 하는 시대

얼마전에 네버윈터나이츠2의 공식포럼에 들렸다가 두번째 확장팩인 스톰 오브 제히르에 대한 한 게이머의 리뷰를 읽었다. 아마 근 몇년간 최고의 rpg일 터인 이 게임은 출시되자 마자 포럼에서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아왔는데 그 대부분은 말도 안되는 병신같은 비난으로 게임이 문제라기 보다는 매뉴얼조차 읽지 않고 게임을 시작하는 병신들의 문제였다.

출시후 한참 시간이 지나고 얼마전 봤던 그 장문의 리뷰는 게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정상적인 게이머의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리뷰였다. 그런데 그 글에 이 게임의 리드 디자이너가 리플을 달았는데 이 리플이 참으로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 리플의 내용은 너무나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땡큐를 연발하고 있었고 그동안 게이머들의 안좋은 반응으로 의기소침 했었는데 이 리뷰 하나로 자신이 그동안 게임을 만들면서 했던 모든 노력을 보상받았노라고 적혀있었다.

그것은 그냥 정당한 리뷰였다. 결코 제작자가 감사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리뷰어가 제작자에게 땡큐를 남발해야할 입장이었다. 좋은 게임에 대해서 게이머가 감사하는게 아니라 그걸 만든 제작자가 감사해하고 있었다. 이 아이러니하고 우울한 상황이 좋은 게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끔 했다.

난 좋은 게임이란 반은 훌륭한 제작자가 만들고 나머지 반은 훌륭한 게이머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이라고 하는 미디어는 작품을 감상하는 수동적 주체인 관객이 아니라 경기에 참가하는 능동적 주체인 '플레이어(Player)'를 필요로 하는 미디어다.

제작자는 룰과 경기장을 만들고 심판을 배치할 뿐이며 그 안에서 어떤 경기를 펼칠지는 완전히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아무리 뛰어나 봐야 룰이 엉망이면 제대로 경기를 할수가 없고 룰이 아무리 뛰어나고 공정해 봐야 플레이어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재미있는 경기가 될수 없다. 따라서 좋은 게임이란 훌륭한 제작자가 만든 룰과 세계에서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훌륭한 게이머가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훌륭한 제작자란 게이머가 최대한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수 있는 기반을 만들수 있어야 하며 최대한 플레이어의 '의도'가 반영될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플레이어의 의도가 반영될수 없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라 버튼을 누르면서 보는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게이머란 게임에 자신만의 의도를 투영하고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을 지니고 실패를 통해 전략을 수정할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엔딩(승리)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지녀야 한다. 물론 치트는 게임에 대한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정신 또한 갖춰야 한다.

게임안에서 플레이어의 실패는 플레이어의 창조력을 자극하고 더 나은 플레이어가 되도록 성장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게임은 끊임없이 플레이어를 실패로 몰고가야 하지만 그 실패의 이유는 룰안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룰의 일관성이 부서지면 플레이어는 정당한 경기를 할수 없다. 정당한 룰안에서 게임은 최대한 창조적인 새디스트가 되어야하며 게이머는 최대한 창조적인 매저키스트가 되어야 한다.

또한 좋은 이야기와 멋진 세계관,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게임이 펼쳐지는 경기장일뿐 게임의 본질이 아니다. 이런것들은 게임이 플레이어에 가하는 실패의 매질속에서 고통을 경감시키고 엔딩을 향한 욕구를 증폭 시키는 역할만 할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훌륭한 제작자가 드문것 만큼 훌륭한 게이머가 드문것이 사실이다. 아니 사실은 훌륭한 제작자보다 훌륭한 게이머가 훨씬 드물다고 생각한다. 멋진 게임들은 많이 만나봤지만 그 게임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한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병신같은 게이머가 많기 때문에 그 수준에 걸맞는 병신같은 게임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게임이란 관객의 능동적 참가를 원하는 예술이므로 그 어느 예술보다도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이 반비례 할수 밖에 없다.

인터넷의 발달로 전체적인 게이머의 수준이 완전히 들통난 순간 훌륭한 제작자들은 다 죽거나 병신같은 제작자로 둔갑할수밖에 없었다. 이제 게임은 게이머의 손을 잡고 엔딩까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며 10분의 집중력도 없는 병신같은 게이머들을 위해 잠시도 쉬지않고 재롱을 떨어댄다. 플레이어의 실패는 절대 용납될수 없으며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이며 절대악이 되었다. 뒤룩뒤룩 살찌고 게을러터진 눈꼽만큼의 근성도 없는 돼지도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더이상 공주는 용기와 지혜를 지닌 선택받은 기사만이 차지할수 있는 메이든이 아니라 게임을 살수 있는 돈을 지불하면 아무나 가질수 있는 창녀가 되었다.  

이제는 게임이 스스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게이머는 구경만 하는 세상이 됐다. 게이머를 게임에 참가시키면 불편하고 머리아픈 게임이라며 너도나도 공식포럼에 몰려가 욕을하고 유저평점을 바닥으로 몰고가며 쓰레기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이런 병신같은 게이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웹진 리뷰어들은 판매량 예상점수로 장단을 맞춰준다. 바야흐로 훌륭한 게이머들이 너무나 진귀해서 훌륭한 게임을 만드는 제작자는 훌륭한 플레이로 자신의 게임을 완성시켜준 게이머에게 감사하는 병신같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댓글 7개:

  1. 참 흥미로운 논평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높은 난이도가 크게 문제 삼아지지 않았죠. 요즘은 깨기 어려운 게임이 마치 구시대 유물처럼 되어버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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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gicscroll - 2010/01/30 14:39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에는 정말 게임다운 게임이 드문거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게임보다는 영화에 가까워 지는거 같아요. 영화같은 그래픽은 원하던 거였지만 게임자체가 영화 관람처럼 수동적으로 변하는건 원하지 않는데 말이죠. 사실 이제는 대자본 게임에는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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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당한 룰안에서 게임은 최대한 창조적인 새디스트가 되어야하며 게이머는 최대한 창조적인 매저키스트가 되어야 한다. - 멋있는 표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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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익명 / 예전에 쓴 글을 다시보니 참... 저때는 그래도 아직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에 화를 낼수도 있었네요. 이제는 다 포기해서 화도 낼수 없게 되니까 뭔가 쓰고 싶은 욕구도 안일어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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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어떤걸 트집 잡았길레요?ㅋㅋㅋ 로딩이야 문제긴했지만 발게이빠들 몰린데선 파티를 직접짜면 몰입도 떨어진다고 아윈데 트집잡아까고 발게이 빠는것도 봤었는데 그런 맥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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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전에 게임을 게임으로서 제대로 바라보는 게이머가 드문거 같아요.
    게임을 영화나 소설의 하위문화로 바라보고 이들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를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정도니
    게임에서 영상미를 따져가며 영상이 구리면 구리다 하는 부류도 있고
    게임에서 글쓰기가 잘됬냐며 글쓰기가 구리면 구리다 하는 부류도 있고(특히나 NMA같은곳)
    게임에서 애니메이션이 구리면 그걸로도 구리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사람들은 게임=현실 시뮬레이터랑 착각을 하는건지 뭔지..

    결국 게임은 게임이 하고 게이머는 그 게임에 덤으로 달린 소설과 영상과 동작을 보며 즐기는꼴이 되버렸죠 ㅋㅋㅋ
    SOZ같은 경우에는 파티 기반이니 발게이만 해온 발게이 빠들은 "스토리에 어울릴 케릭달라능"식으로 케릭이 없이 파티원을 짜서 하는 시스템 자체를 까더군요. 뭐 스토리의 깊이가 사라진다니 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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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마음에 드는 글이라 퍼가게습니다. 출처 명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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