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30

데이어스 엑스 2 (Deus Ex: Invisible War)

발매년: 2003
제작사: Ion Storm
유통사: Eidos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Realistic


'게임에서 스토리란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라는 존 카멕의 발언은 게임에서 스토리가 하는 역할의 핵심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문장이라고 할수있다. 게임에서 스토리가 하는 역할은 그저 분위기를 잡아주고 게임플레이를 지속하게 할만한 핑계와 이유를 제공하면 제 몫을 다했다고 볼수있다. 사실 크게 보면 게임플레이와 스토리는 그 성격상 대극에 위치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플레이란 그 주도권이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므로 플레이어는 주어진 환경 조건들을 최대한 컨트롤하여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바꾸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나 스토리라고 하는것은 그 주도권이 청자의 것이 아닌 화자의 것으로서 청자에게 즐거움을 주도록 모든 환경 조건은 화자가 컨트롤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플레이어 입장에서 게임플레이란 능동적인 체험이며 스토리는 수동적인 체험이다.

그러나 어드벤쳐와 rpg라는 장르는 게임의 스토리를 게임플레이의 조역이 아닌 주역으로 다룰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해결하기위한 시도를 해왔던 장르이다.(여기서 던전형rpg는 논외로 하자.) 초창기 텍스트 어드벤쳐는 플레이어를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삼는 1인칭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기위한 판단과 선택을 하지만 이 선택은 다른 결과로 이끄는 진정한 선택이라기 보다는 정해진 하나의 답을 찾기위한 시행착오와 같은 것이었다. 정해진 답을 찾는 게임이었지만 어쨌든 플레이어에게 스토리진행의 주도권을 줌으로서 인터렉티브 픽션(interactive fiction)이라는 참으로 거창한 명칭마저 부여받았었다.

rpg에서는 이러한 어드벤쳐적 특성을 물려받아 이야기를 퀘스트라는 단위로 잘게 쪼개어 각각의 퀘스트를 플레이어가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 가능하게 하여 전체적인 면에서 좀 더 비선형적인 진행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비선형적인 진행은 분명히 스토리 자체를 게임플레이의 영역에 끌어들이는것이 가능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나리오라고 부르는 계산되고 잘 짜여진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껏해야 시작과 끝이 있는 '설정'이라고 불릴만한것이지 소설에 버금가는 이야기의 템포와 강약을 포함시키는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템포와 강약을 가진 스토리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스토리에서 플레이어의 주도권을 뺏어올수밖에 없었고 스토리를 게임플레이의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시도는 무산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스토리와 게임플레이를 완전히 분리시켜 배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rpg는 메인퀘스트와 서브퀘스트로 나눠졌고 메인퀘스트에서는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게임이 지시하는 대로 종 노릇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게임에서는 도데체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것인지, 아니면 게임이 플레이어를 가지고 노는것인지 헷갈릴때가 많다. 아무리 뛰어난 스토리를 위해서라지만 그것때문에 플레이어를 종처럼 부려먹으면 그 게임은 게임의 본분을 망각한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처럼 부차적인것이 되어야지 주도적인 위치에 서면 게임으로부터 플레이어를 배제시키는 것이다.

Deus Ex는 이러한 스토리냐 게임플레이냐의 양자택일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작품이었다. 잘 짜여진 선형적인 스토리를 마치 플레이어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진행된것처럼 플레이어를 속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 야심찬 시도는 게임내의 다른 여러 시도와 함께 별 영양가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어들이는 바람에 Deus Ex의 제작자들은 두번째 기회를 얻게 된다. 제작자들은 1편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1편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속편을 제작한다.

이전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1편의 특징은 크게 보자면 3가지 파트로 나누는게 가능하다.

1. fps에 rpg적인 캐릭터 커스터마이징과 성장을 접목
2. 하나의 문제에 다양한 해결방법 제공
3. 선형적이지만 플레이어가 주도하는것 같은 스토리

두마리 토끼도 아닌 세마리 토끼를 한번에 쫓은 결과는 알다시피 빈손이었다. 복잡한 rpg요소는 난이도 조절의 실패로 게임 초반을 제외하고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2편에서는 이런 무모한 욕심을 버리고 3번인 스토리와 자유도의 결합에 모든것을 집중시켰다. 1번과 2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1편에 비하면 훨씬 축소되고 단순화 되었다. 사실 2편은 1,2번의 축소때문에 크게 욕을 먹고 졸작으로 분류되는 게임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1편에서 3번이 실패하다보니 3번의 요소가 존재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2편에서 1,2번을 포기하고 3번을 성공시켰지만 1편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애초에 3번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 관점에서는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기도 한데 어짜피 난이도 조절 실패로 복잡한 캐릭터 성장 시스템이 제대로 활용이 안된다면 그런 시스템은 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의 선택은 난이도 밸런스를 맞춰서 시스템을 살리는거겠지만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면 시스템을 포기하는게 차선책이지 쓸모없는 시스템을 유지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3번 하나만으로도 전례가 없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만하기 때문에 1,2번을 포기한 결정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선택이 구매자들이 원한 선택이 아니었을 뿐이다.

 

스토리는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스토리 진행에 모든것을 쏟아부은 게임 답게 1편의 스토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편은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결이었다. 플레이어는 선의 편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당수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게 되지만 끝에가서 (게임캐릭터들이)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나 세가지 배드엔딩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좀 시시한 스토리였다.

그러나 2편은 이런 유치한 선악의 대결이 아닌 선과 악이 모호한 현실적인 세계로 플레이어를 초대한다. 여전히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1편과 같은 절대악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플레이어는 그 가운데 떨어져서 이 각기 다른 구원자들의 균형을 맞추는 인물이라고 할수있다.

1편에서 플레이어는 강제적으로 nsf라는 팩션에 종속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unatco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했고 nsf로 돌아선 후에는 또다시 그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장기말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시나리오가 이지경이니 플레이어가 무슨 선택의 자유를 느낄수 있었겠는가. 시나리오 작가의 고민이 없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2편에서는 플레이어를 강제적으로 어느 한 팩션에 소속시키지 않는다. 여러 팩션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플레이어를 이용하려고 하고 플레이어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역으로 이들을 이용한다.

게임에서는 누군가 명령을 내리면 그것을 수행해야하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플레이어가 충분히 동의할 만한 이유와 목적이 없다면 대단히 기분이 나쁘게 된다. 문제는 플레이어의 성향이 제각기 다르다는데에 있다. 'XXX를 구해라!' 라고 명령한다면 누군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뛰어들겠지만 누군가는 도데체 알지도 못하는 놈을 내가 왜 구해야 하느냐면서 거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데이어스엑스2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상황에 대한 명령이 동시에 여러개가 제공된다. 위와같은 상황에서 어떤놈은 'XXX를 구해라!' 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놈은 'XXX를 구하지말고 OOO로 와라!' 또다른놈은 'XXX를 죽여라!' 이런식으로 서로 상반되는 명령이 제공되는것이다. 게다가 플레이어는 기회가 된다면 이런 명령을 내리는 주체중에 맘에 안드는쪽을 살해하거나 어느 한쪽의 명령을 듣는것처럼 하다가 최후에 배신하는것조차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성향의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킬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한 상황에 대한 여러 선택은 일반적인rpg에서도 종종 볼수 있는것들이다. 그러나 데이어스엑스2가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아주 잘 짜여진 선형적인 플롯 하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통의 rpg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하나의 퀘스트에서 끝나게 된다. 그 선택이 끝나면 전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 선택의 연속성이 없는것이다. 하지만 데이어스엑스2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같은 사람들과 단일한 이야기 위에서 수많은 선택을 해나가기 때문에 선택의 결과가 즉흥적이고 단발적이기 보다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이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대단한 경험을 선사하는데 단순히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다는 느낌뿐만이 아니라 여러 캐릭터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한명의 캐릭터로써의 감정마저 느끼게 된다. 어느 한쪽의 요청을 들어주려면 다른 한쪽의 요청과는 반대되는 행위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때로는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청을 들어준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방향과는 다른쪽으로 갈때면 배신감과 분노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두번 만나고 마는 캐릭터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만나면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는 개성적인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발더스 게이나 구공화국의 기사들같은 바이오웨어표 게임들의 파티원들과 플레이어와의 관계 발전과도 전혀 다르다. 바이오웨어표 파티원들은 어쨌거나 플레이어의 부하이며 아무리 의견차가 있어봐야 결국 파티 탈퇴 외에는 별것이 없다. 그러나 데이어스엑스2의 캐릭터들은 언제나 플레이어의 적인지 동료인지 확실히 알수가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플레이어의 경쟁자들이다. 스토리 자체가 이들 캐릭터들과 플레이어의 관계를 통해 발전되므로 그들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과의 관계쌓기를 위해 게임은 통신시스템을 적극 활용한다. 플레이어는 사소한 일에서 조차 끊임없이 여러 팩션의 간섭을 받는다. 어느 한쪽 팩션에 불리한 행동을 할때면 그 팩션의 인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고 및 회유의 메시지를 받게 되며 심지어 사소한 움직임에조차 반응을 보인다. 예를들면 한 인물이 뭔가 중요한 정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을때 그곳으로 가다가 생각이 바뀌어 문앞에서 돌아서자 갑자기 통신으로 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곳에서 이러한 인터렉티브한 반응을 접하게 되서 깜짝 놀랄때가 많다. 게임내에서 플레이어가 했던 아주 사소한 행동이 특정 인물에게 관찰되어 기록되어있는걸 보거나 대화 선택문에서의 사소한 선택이 다른 인물과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등 정말 마법과 같은 순간들이 있다.

게임의 진행방식은 1편과는 달리 좀더 rpg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1편의 경우 대부분은 fps처럼 하나의 스테이지와 하나의 주 목표가 주어진다.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그런 방식이었다. 홍콩에서는 하나의 무대에 여러 퀘스트가 있는 형식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한번에 하나의 목표가 주어지는 fps의 스테이지 형식이라고 볼수있었다. 그러나 2편에서는 스테이지로 구분된 형식이 아닌 1편의 홍콩처럼 도시로 구분된 무대를 사용한다. 하나의 도시에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가 공존하며 그 도시의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면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1편보다 훨씬 많은 서브 퀘스트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전형적인 rpg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점도 1편의 팬들을 당황시킨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브퀘스트들은 각각이 독립적인 퀘스트들이 아니라 하나의 서브 퀘스트가 전혀 다른 서브 퀘스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기본적으로 메인스토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어떤것들은 메인스토리와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메인스토리의 복선이라는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만큼 서브퀘스트 하나하나가 세계관과 현재상황을 설명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메인플롯과 뭉쳐져서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된다. 커피회사 퀘스트나 주변 캐릭터와 관련된 몇가지 퀘스트는 시작부터 종반까지 펼쳐지면서 아주 훌륭한 서브플롯의 역할을 해낸다.

메인퀘스트는 수많은 선택을 제공하면서도 그 여러선택에 대한 결과를 하나로 이끌어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도록 플레이어를 잘 설득시키고 있다. 1편에서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거의 다른 인물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면 2편에서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은 그보다는 플레이어의 궁금증을 유발시킴으로서 강제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여러 팩션들의 요청은 서로 상충되지만 결국은 플레이어는 어느 한 팩션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서 다음 지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플레이어 스스로 획득한 정보에 의해 움직이므로 강제적이고 단일한 진행에서도 플레이어는 자발적인 진행이라고 느끼게 되는것이다. 따라서 스토리는 끊임없이 플레이어에게 궁금증과 비밀을 선사하고 그것을 충격적인 반전으로 해소한다.

1편의 반전들이 누구나 예측가능한 뻔한 반전이라면 2편의 반전들은 실로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들을 보여준다. 게임의 범위를 벗어난 기가막히게 훌륭한 스토리임에도 그것을 리뷰상에서 자세히 표현할수없는 이유는 이런 반전들의 힌트를 주게될까봐서이다. 2편의 스토리는 'xxx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조차 그 스토리의 힘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언급하기가 힘들다. 필자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이 게임의 힘은 전적으로 스토리로부터 나온다. 그만큼 스토리가 훌륭하며 스포일러에 취약하다. 다만 내가 할수 있는 말은 절대로 1편을 먼저 해야 2편의 스토리를 100퍼센트 느낄수 있다는것이다. 그것도 세세한 부분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바로 연달아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후반에서는 대단한 감동을 느낄것이다. 철학적인 스토리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런 게임에 붙여야 하는 명칭이지 토먼트같은 게임에 붙이는 명칭이 아니다. 토먼트의 스토리는 데이어스엑스2의 스토리에 비하면 고등학생의 형이상학적 개똥철학이라고 할수있다. 물론 데이어스엑스2의 스토리가 대단히 참신하다고 볼수는 없다. sf에서 아주 많이 다뤄지고 진부한 주제이지만 그 스토리의 주인공으로서 체험하는 느낌은 특별하다. 누구라도 종반의 마지막 결정에 다다르면 심각하게 철학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힘은 아주 잘 만들어진 개성적인 캐릭터들에 의해 더욱 탄력을 받는다. 초반부터 종반까지 가볍게 다뤄지는 주변 캐릭터는 없으며 캐리커쳐같이 얄팍하거나 단순한 비인간적인 캐릭터는 없다. 대사와 음성연기는 대단히 뛰어나며 캐릭터의 미묘한 개성을 잘 드러낸다. 숨막히는 스토리에서 몇몇 캐릭터를 통해 가끔씩 터지는 가벼운 개그는 캐릭터에 친밀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이다!

스토리상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1편과 마찬가지로 반전이 조금 도를 넘을정도로 많다는 점이다. 첫번째 반전에서 정말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두번 세번 반복되면 약발이 떨어지는건 피할수 없는 일이다. 반전을 조금만 줄였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작가는 반전 매니아인듯 싶다. 그 외에는 정말 뛰어나다. 이정도 되는 잘 짜여진 스토리는 게임매체에서 찾기는 상당히 힘들다. 잘 쓰여진 왠만한 사이버펑크 소설과 견주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것이다. 이런 훌륭한 스토리를 100퍼센트 느끼기위해 게임상에 등장하는 모든 텍스트를 놓치지말고 읽을것을 권한다.

스토리관련 외의 게임플레이를 따로 이야기 하자면 혹평밖에 할게 없다. 액션의 난이도는 1편보다 더 쉬워졌다. 잘하면 아마 엔딩볼때까지 단 한번도 죽지않고 플레이가 가능할것이다. 레벨디자인을 보자면 규모는 1편의 거대한 레벨에 비하면 정말 코딱지만한 맵밖에 없다. 1편의 수중연구소같은 규모는 절대 없다. 가장 큰 맵도 클리어하는데 30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심심하면 로딩존이 나오기 때문에 안그래도 좁은 맵이 더욱 좁게 느껴진다.

그러나 희안하게도 오히려 이런점이 플레이어를 스토리에 더 몰입시키게 하는 요인이 된다. 보통 게임과는 다르게 스토리진행 자체가 게임의 재미의 중점이 되다보니 플레이어의 사망이 흐름의 맥을 끊는 요소가 되어버리고 한없이 헤메는 맵이 아닌 작은 규모의 맵이 도리어 스토리의 템포가 쳐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짧고 쉬운 액션 난이도가 스토리 진행의 템포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스토리에 집중하는게 가능하고 소설과 같은 전개의 속도와 비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인해 1편과는 정 반대의 게임이라고 할수 있겠다. 1편은 액션이 주가되고 스토리가 양념으로 들어간 게임이라면 2편은 스토리가 주가 되고 액션이 사이사이에 양념식으로 첨가되어 있다. 스토리 자체가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감상의 형태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게임플레이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스토리가 중심인 게임임에도 전혀 답답하거나 게임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진정으로 스토리를 '보는'게임이 아니라 '플레이'하는 게임이라고 할수있겠다.

게임의 비주얼에 대해서도 칭찬을 하고싶다. 1편은 이게 도데체 사이버펑크물이 맞는지 모를정도로 비주얼이 평범했지만 2편의 비주얼은 완전히 전형적인 사이버펑크 비주얼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어두운 푸른 조명과 이집트의 아콜로지 디자인은 블레이드러너를 연상케하고 아콜로지 내부에서는 아예 영화와 거의 똑같은 장면을 볼수있다. 어퍼시애틀의 네온사인과 로워시애틀의 할렘가나 오마르같은 테크뮤턴트, AI아이돌, 신생종교같은 요소들은 사이버펑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선물이 될것이다. 이미 기술적으로는 형편없어보이는 그래픽이지만 아직도 분위기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그래픽이라고 할수 있다.

음악도 전편에 비하면 영화음악처럼 변해서 분위기를 해치거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음악은 없지만 분위기를 더해주는, 게임의 성격에 아주 걸맞는 음악을 들려준다. 메인테마는 전작의 뽕짝느낌은 사라지고 게임 분위기와 걸맞게 느리고 장중하게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2편의 메인테마가 더 마음에 들었다.

데이어스엑스2는 겉으로 봤을때는 대단히 못만든 게임처럼 보인다. 움직임과 물리엔진은 어색하고 텍스쳐 해상도가 낮아 캐릭터들은 밋밋하고 지저분해 보인다. 총쏘는 느낌은 fps의 관점에서는 정말 최악의 거지같은 느낌이고 맵은 좁아 터졌는데 몇발자국만 옮겨도 로딩 메세지가 뜬다. 전투에서 AI의 대응은 가만히 서서 쳐맞는게 전부인것처럼 보이고 인터페이스는 콘솔패드에 맞춰져 있는터라 마우스와 키보드로는 병맛이 폭발한다. 일반적인 fps의 관점으로는 쓰레기중에 이런 쓰레기가 없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fps가 아니다. 1편은 rpg를 가장한 fps였지만 2편은 형식상으로는 fps처럼 보여도 사실은 뼈속까지 rpg인 게임이다. 그것도 아주 독특하고 유니크한 전례가 없는 rpg이다. 세계의 설정 위에서 돌아다니는 rpg가 아닌 스토리 위에서 돌아다니는 새로운 rpg의 가능성을 보여준 게임이다. 워렌스펙터의 궁극적인 지향점에 가장 가까운 게임이며 스토리와 자유도가 결합된 rpg의 미래를 보여준 게임이라고 할수있다. 이 게임에는 액션이 없다. 퍼즐또한 없다. 오로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 그 자체를 플레이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터렉티브 픽션이며 진정한 롤 플레잉(role playing) 게임이다.

게이머들은 부디 게임의 허접한 겉모습에 속아 진짜배기 알맹이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미 판매량은 우를 범했다는것을 증명해 주었다.) 데이어스엑스는 2편에 와서야 다른 게임과는 차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고 rpg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개인적으로는 rpg에서 스토리를 강조하고 싶으면 이런식으로 나갔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런게임을 두번 다시 볼수있을것 같지 않다.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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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어스 엑스 (Deus Ex)

발매년: 2000
제작사: Ion Storm
유통사: Eidos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Realistic


우울하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압도적인 높이로 왜소한 인간의 존재를 비웃는듯한 거대한 스카이라인, 네온불빛 사이를 무력하게 배회하는 고독한 군중들, 희망과 경이가 사라진채 쓰레기처럼 뒹구는 테크놀러지의 과잉, 그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인류를 위협하는 음모가 피어나고 특별한 재능을 지닌 범죄자 혹은 훈련받은 특수 요원이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미친 AI와의 마지막 사투를 준비한다.

이뭐병... 중세 판타지 만큼이나 뻔한 배경에 뻔한 얘기. 그것이 바로 사이버펑크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게임의 세계에선 사이버펑크물이 드물다. 게다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는 더더욱 드물다. 데이어스 엑스는 그런 비주류 아닌 비주류인 사이버펑크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거의 유일한 게임일 것이다. 언제나 질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안팔리는' 게임을 만들어 왔던 워렌스펙터는 이 게임으로 대박을 친다. 그럼 도데체 왜 갑자기 안팔리던 물건이 잘팔린 것일까? 가능성은 둘중에 하나다. 갑자기 대중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본 드문 경우거나 물건이 대중의 입맛에 맞게 그 가치를 잃어버렸거나...

데이어스 엑스는 최초로 fps와 rpg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혁신적인 게임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울티마 언더월드로부터 이어져온 루킹글래스의 오랜 실험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시스템쇼크와 시프를 적절한 비율로 혼합하고 전통적 rpg의 특성인 npc와의 대화를 통한 스토리진행이라는 양념을 추가하고 잘 익히면 데이어스 엑스 완성이다. 그러나 모든 잡탕 요리가 그렇듯 각각의 요소가 조화롭게 뭉쳐서 원 재료와는 다른 새로운 맛을 내는 아이덴티티를 획득하는데 실패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맛을 만들어내기 쉽다. 과연 데이어스 엑스는 어느쪽에 속하는 요리일까?

우선 데이어스 엑스는 대단히 야심적인 게임이라고 할수 있다. fps의 직관적인 액션과 rpg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결합에 캐릭터의 특성에 따른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 스토리 진행상 플레이어의 선택이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구현하면서도 기승전결이 뚜렷한 플롯과 반전을 거듭하는 갈등 구조를 보여주겠다는 참으로 엄청난 야심을 드러낸다. 이중 한가지만 제대로 되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만한 요소들이다. 특히 자유도와 구성이 탄탄한 스토리의 결합은 오래전부터 워렌스펙터가 추구해온 그의 궁극적인 비젼이다.

rpg에서 자유도와 밀도높은 스토리는 마치 물과 기름같은 존재라서 한가지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는 포기할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둘의 비율을 적절하게 섞어봐야 양쪽 다 수준에 못미치는 결과만 나왔을 뿐이었다. 워렌스펙터는 이 둘을 성공적으로 혼합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선형적인 잘 짜여진 스토리를 만들되 그것을 마치 비선형적인 진행인것처럼 플레이어를 속인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것 같기도 하고 말장난 같기도 한 방법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것이다. -플레이어에게 선택과 자유를 제공하지만 그 선택과 자유는 메인스토리의 큰 줄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메인퀘스트와 서브퀘스트를 분리하여 스토리와 자유를 눈에 띄게 완전히 분리시키는 발더스게이같은 게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스토리상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인물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지만 결국 나중의 결과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인 스토리의 큰 줄기의 결과는 같지만 세세한 과정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데이어스 엑스의 자유도와 스토리는 바로 이러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토리상 폴을 살리거나 죽이는게 가능하며 그에 따라 스토리가 변한다. 그러나 그 변하는 부분들은 사실 스토리의 큰 줄기에는 아무 영향이 없으며 사소한 대화나 이벤트가 바뀔 뿐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게임을 진행하는동안 셀수 없이 많아서 마치 내가 하는 행동이 스토리를 결정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선택과 자유가 첫번째 플레이에서 플레이어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이렇게 진행되도록 정해진건지 아니면 플레이어의 선택이었던 건지 확실히 알기가 힘들다. 그래서 처음 플레이 시에는 그냥 이게 정해진 스토리인갑다 하고 별 생각없이 플레이 하게 된다. 두번째 플레이에 다른 식으로 플레이했을때에야 '아니 이럴수가 이게 가능했다니!!' 하고 놀라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스토리 전개는 두번째의 플레이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는것이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왜냐면 첫번째와 아무리 다른 선택을 해도 결국 커다란 결과는 바꿀수 없다는걸 깨닫기 때문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첫번째 플레이에서만 이러한 선택과 자유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방식은 확실히 자유도와 스토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식이지만 단지 1회용이다. 2회째에는 큰 줄기의 구조가 다 드러남으로서 환상이 완전히 깨지게 된다. 그런데 1회째에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플레이어가 알기 모호하게 해놨으니 완전한 실패라고 볼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치명적인 문제는 비선형적인 느낌을 주는 선형적 스토리를 추구했으면서도 스토리상 전혀 비선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강제적인 진행이 많다는 것이다. 비선형적인 느낌을 주려면 이러한 강제진행 포인트를 최대한 설득력있게 설명해서 하나의 길이라도 플레이어가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을 생각하기 힘들만큼의 개연성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부분에서 크게 실패함으로서 전체적인 진행이 완전히 선형적인 느낌을 준다. unatco에서 nsf로의 전향이 대표적인 부분으로 플레이어가 그동안 열심히 일해왔던 unatco를 배반하는데 거의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작은 부분에서는 많은 선택권을 주면서도 오히려 이러한 큰 진영을 선택하는데 플레이어의 선택권이 없음으로서 플레이어와 주인공과의 일체감은 완전히 깨져버린다. 비선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제작진은 수많은 가지를 만들었을텐데 그 힘든 노력들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자유도와 스토리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야심찬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나머지 시도들은 어떨까?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은 상당한 수준이다. 왠만한 rpg 뺨칠 정도로 다양한 스킬과 능력을 선택할수 있으며 무기도 여러 부속을 사용한 개조가 가능하다. 또한 부위별 피해가 존재해서 다리를 다치면 이동력이 떨어지고 팔을 다치면 조준점이 벌어지는 등 일반적인 fps와는 차별된 특성을 보여준다. 퀘스트의 성공을 통해 얻어지는 스킬포인트로 성장하는 캐릭터는 전형적인 rpg의 룰을 보여주고 있으며 플레이어가 원하는 어떤 전문 캐릭터도 소화 가능하다. 육체파 돌격형 전투원도 가능하며 도둑같은 잠입형 캐릭터로 키울수도 있으며 주변 장비를 이용하는 해킹 전문 요원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게임은 이렇게 훌륭한 캐릭터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는 또다시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친다. 이 훌륭한 시스템을 100퍼센트 활용할 만한 난이도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초반에 캐릭터가 특별하게 뛰어난 능력이 없을때에는 그나마 전문화시킨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살아남을수 있는 아주 적절한 난이도를 보여주지만 초반이 지나고 캐릭터가 점점 성장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모든것이 긴장감을 잃고 시시해지기 시작한다.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처럼 사정없이 벌어지던 조준점은 퀘이크처럼 고정된 조준점이 되어버리고 맺집은 점점 더 쎄지는데 적들은 초반부터 끝날때까지 똑같은 놈들이다. 처음엔 경비로봇이 나타나면 무조건 숨어야 했지만 후반에는 그냥 장난감에 불과해진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나지도 않고 한번에 덤비는 숫자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초반의 긴장감 넘치는 전투에 비하면 마치 수퍼맨이 된것 마냥 아무런 조심성 없이 활개치고 날아다니는게 가능하다. 특히 홍콩에서 얻게되는 무적의 칼을 얻고 나면 이미 이 게임에서 전투는 존재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잠입요소도 시프시리즈에 비하면 완전 애들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춤을춰도 절대 들키지 않는다. AI의 행동은 개미보다 단순하며 그냥 루트대로 걸어다닐 뿐 인간다운 모습은 절대 발견할수 없다. 잠입에 있어서 들킨다와 들키지 않는다의 경계가 모호해야 잠입의 흥분이 생기는 것인데 데이어스 엑스는 이 경계가 너무나 뚜렷하게 인지되기 때문에 그 경계를 파악하는 순간 이미 잠입은 아무런 흥분도 재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나마 초반엔 전투가 힘겹기 때문에 잠입이 필수적으로 필요하지만 전투가 쉬운 중반부터는 잠입은 그냥 병신짓이 된다.

무기의 개조도 초반을 제외하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처음에는 스코프 하나를 다는것만 해도 엄청난 차이를 주지만 나중에는 부품도 남아돌고 미친듯이 강력한 무기들을 가지게 된다. 전투 밸런스의 완전한 붕괴로 기껏 넣어놓은 잠입이나 무기개조같은 요소들이 완전히 쓸모가 없게 된것이다. 이처럼 fps와 rpg가 결합된 게임에선 fps로서의 실패가 rpg요소의 실패까지 불러오는 셈이 된다.

이런 병맛나는 저난이도는 제작자가 워렌스펙터라는데서 더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데이어스 엑스 이전작인 시프만 해도 대단한 고난이도로 악명을 떨칠 정도였기 때문이다. 워렌스펙터는 결코 쉬운게임을 만들던 제작자가 아니었다. 마션드림즈던 울티마언더월드던 그가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들은 충분히 게임을 즐겁게 만들던 난이도가 존재했다. 아무래도 그는 시프의 상업적 실패 원인을 높은 난이도로 규정했던것 같다. 시프 이후에 그가 만든 게임들은 난이도에서 형편없는 수준을 보여준다. 데이어스 엑스가 바로 그 형편없는 난이도의 시작점이었다. 만약 데이어스 엑스 마저도 상업적으로 실패했다면 그러한 일은 막을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멍청한 대중이 훌륭한 제작자를 반신불수로 만든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면 뭘하나. 난이도가 형편없는데... 게임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재미를 느끼는것인데 '문제'자체가 사라지면 무슨 재미를 느끼라는것인가.

레벨디자인도 좀 문제가 있다. 다양한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 게임인 만큼 레벨자체도 그에 걸맞게 비선형적인 구조를 보여줘야 한다. 첫번째 레벨은 그러한 비선형적 레벨디자인의 정석을 보여준다. 하나의 커다란 공간의 중심에 목표물이 있고 접근위치는 어디든 플레이어가 정할수 있다. 과정도 플레이어의 캐릭터에 맞게 다양한 선택을 할수 있다. 필수 목표 외에 2차 3차 목표가 존재해서 맵의 나머지 부분도 활용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레벨디자인이 첫판을 지나면 도무지 찾아보기가 힘들다는게 문제다. 몇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맵들은 순차적으로 문제를 제시하고 그 각각의 문제들에만 다양한 시도를 허락한다. 맵 전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하나 하나 차례대로 문제를 해결하여 목표에 도달하게 하니 플레이어가 가진 다양한 카드들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게 하는게 아니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수동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게다가 이것이 게임내내 끝도 없이 반복되니 나중에는 매너리즘을 느끼게 된다. 항상 해킹과 자물쇠 따기, 수영해서 우회, 정문돌파의 반복. 지겨워진다. 다양한 문제 해결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플레이어가 스스로 전체 계획을 짜고 스스로 방법을 선택할때 의미가 있는것이지 매번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해놓고 아무 방법이나 선택해도 해결 가능하게 해놓는건 그냥 낭비일 뿐이다.

데이어스 엑스에서 내 기억에 남은 레벨디자인은 딱 두개 뿐이다. 훌륭한 첫번째 레벨과 수중 연구소 레벨이다. 수중 연구소 레벨은 그 구조보다는 규모와 표현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나머지 레벨은 어땠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대다수의 레벨디자인이 개성없고 별볼일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스토리는 전형적인 사이버펑크식 AI난동물에 온갖 음모론 이야기들을 접합시키고 반전을 마구마구 넣은다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식의 화려한 클라이막스를 포함시킨것이다. 게임디자인부터 잡탕스럽지만 스토리 또한 그에 질세라 굉장히 난잡스럽다. 특히 반전의 남발이 너무 심한데 적인줄 알았는데 아군이더라 근데 그게 다시 적이되었는데 근데 또 아군이 될수도 있다 뭐 이런식의 뒤집고 뒤집고 뒤집고... 마치 안정환이 패널티에이리어 안에서 종이접기 하듯이 계속 상황이 반전된다. 근데 그 반전되는 양상이 너무 뻔하고 전형적이라 전혀 놀랍지가 않다. 사이버펑크물에서 AI 나오면 당연히 XXX하는거 아닌가. 근데 또다른 AI가 출현하면 또 당연히 OOO하는거 아닌가. 결국 마지막에는 주인공이랑 ㅇㅇㅇ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말그대로 실현된다.

뻔한 이야기는 좋다 이거야. 근데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 하는 주체가 그 이야기를 엄청 참신하고 놀라운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면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난다. 데이어스 엑스는 그런식이다. 야 이거봐 사이버펑크에 음모론을 섞었어! 끝내주지? 뭔가 있을거 같지?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음모론은 뻔하고 유치한 성당기사단의 세계정복 계획이고 그 계획을 단지 사이버펑크적으로 수행하겠다 뭐 이런식이다. 게다가 사이버펑크를 기본 세계관으로 잡았는데도 전혀 사이버펑크의 맛이 나질 않는다는것도 신기한 일이다. 사이버펑크적인 온갖 요소들이 총출동한다. 인조인간, 신체개조, 맛간AI, 홍콩의 밤거리~, 야쿠자 대신 삼합회... 나올거 다 나오는데도 이상하게 그 테크놀러지의 쓰레기통같은 특유의 느낌이 없다. 전혀 미래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냥 현재처럼 느껴진다. 그냥 단골매뉴만 집어넣었을뿐 독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데이어스 엑스의 세계는 마치 빈껍데기만 있는 세계같다.

캐릭터도 밋밋하기 짝이없다. 대체적으로 음성연기는 병맛이고 생각외로 대사도 별로 많지가 않아서 캐릭터마다의 개성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거의 없다. 처음부터 설치는 최종보스씨 께서는 너무나 전형적인 세계정복형 악당이시라 싸우고 싶은 의욕도 잘 안생긴다. 보스씨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인 AI님께서는 진짜AI처럼 기계적으로만 얘기하니 플레이어와 아무런 감정적 화학반응이 일지 않는다. 근데 갑자기 끝에가서 사랑고백을 하니 플레이어로써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폴 덴튼 정도가 그나마 캐릭터로서의 존재감이 있었다고 할수있다. 나머지는 캐릭터로서 모두 실패다.

전반적으로 이 게임은 온갖 물건을 다 팔지만 정작 제대로 된 물건은 한개도 안파는 궁극의 잡화점같은 게임이다. 모든면에서 기가 막히게 핵심을 피해갈 뿐 아니라 양손이 항상 헛박수를 친다. 누군가 아주 교묘하게 망가뜨린것 같은 놀라운 밸런스의 무밸런스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대단히 야심적인 게임이 이런식으로 별볼일없이 무너지는걸 볼때면 가슴이 아프다. 별 야심없는 게임이 망가지면 아쉬움도 없는데 말이다. 희대의 명작인 시프 이후에 만든 게임이 이토록 부실한데는 제작진의 실력부족보다는 아무래도 욕심이 너무 컷던게 아닐까 싶다. 스스로 제어할수 없을만큼 너무 많은 요소들을 쏟아부었고 결국 그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따로노는 맛없는 요리가 되었다. 감히 워렌스펙터가 만든 최악의 작품이 이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확실히 안팔리던 작가의 작품이 갑자기 잘팔릴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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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븐 (Riven: The Sequel to Myst)

발매년: 1997
개발사: Cyan Worlds
유통사: Broderbund Software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없음


누가 나에게 리븐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하라고 하면 난 '완벽한 밸런스'라고 답하겠다. 리븐은 분석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분석하기 위해서 어느 한 요소를 떼어내면 전부가 무너진다. 각각의 요소를 아무리 따로 설명해봐야 리븐이 전해주는 진정한 체험의 가치를 설명할수 없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이 놀라운 밸런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제작자가 자신이 만들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철저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를 창조하려고 했던 여러 제작자들을 보아왔다. '로드 브리티쉬'리차드 게리엇은 그중 대표라고 할만한 인물로 울티마라는 게임을 통해 브리타니아라는 가상 세계를 구축해왔다. 리차드 게리엇은 게임속 세계를 그저 게임을 위한 단순한 배경이 아닌 독자적인 역사와 철학을 가진 pseudo-medieval world로 구성하고 현실의 물리법칙을 모방하는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이런 가상세계를 만드는데 집착한 이유는 그것이 플레이어를 극도의 몰입상태에 빠지게 하여 실제 체험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기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함정은 제작자의 욕심이 기술적한계를 넘어가버리기가 쉽다는 것이다. 더 현실과 같은 물리법칙, 더 현실과 같은 그래픽, 더 현실과 같은 방대함... 이런것들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엔 기술적 한계에 부딪쳐 제작기간의 대부분을 기술구현에만 소비하고 정작 그 기술로 만들어져야할 게임컨텐츠의 완성도는 등한시 하게 되는것이다. 처음 계획한 야심적인 의도의 1/10도 못살린채로 말이다. 울티마9는 이러한 게임의 대표적인 예로 들수 있으며, 여러 야심찬 대작급rpg들도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게이머들과 제작자들은 언제나 기술적 진보에 목말라했고 그것이 가능해질때마다 열광해왔다. 이제는 실제와 같은 그래픽, 물리엔진, 인간같은 AI등등의 기술적 요구등이 거의 실현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기술들을 가지고 진지하게 가상 세계를 구축하려는 제작자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전에는 꿈과 같았던 기술들로 기껏 시도되는 것들은 영화적인 단발적 연출일뿐 플레이어를 현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정도의 몰입을 제공하는 게임플레이의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져갈 뿐이다. 마치 과학의 발전만을 추구하다가 과학의 힘에 의해 아포칼립스를 맞게되는 진부한 3류 sf 펄프픽션의 스토리같은 상황인 것이다.

리븐은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샹그릴라에 다다를수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에 묵직한 경종을 울리는 고대의 현자같은 게임이다. 리븐을 플레이하고 나면 우리를 현실로부터 게임세계로 빨아들이는 가상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필요한것은 최신기술이 아니라 제작자의 탁월한 비젼과 그 비젼을 플레이어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장인적 치밀함이라는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리븐에는 기술적인 요소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적으로는 이미지와 동영상 끼리의 연결과 마우스로 클릭할수 있는 스팟이 전부인 미스트와 완전히 동일하며 다만 프리렌더링cg의 퀄리티가 상승했을 뿐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기술만을 가지고 그 어떤 야심적인 게임보다도 플레이어를 완벽하게 게임세계에 몰입시키는 원인은 무시무시한 게임세계의 디테일 구현에 있다.

리븐의 세계에서는 지구인 외에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외계어를 사용한다. 그들만의 문자가 있으며 숫자체계도 있다.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데 언어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언어야말로 문화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김새가 괴상하더라도 갑자기 영어를 쓰면 지구인이 인형옷을 입은것처럼 느껴지지만 지구인과 똑같은 외모라도 들어본적도 없는 이상한 언어를 쓰면 대단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것이다. 리븐에는 이 외계어에 대한 어떤 해석도 해주지 않는다. 알아들을수 없고 읽을수 없으니 그저 상상력을 동원해 짐작할뿐이다. 이것으로 인해 게임 세계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깊이있게 느껴지게 된다.

리븐의 제작자들은 이러한 낯선 세계를 창조해놓고는 플레이어에게 절대로 직접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모든것을 플레이어 스스로 상상해야 하고 깨우쳐야만 한다. 직접적인 설명과 편의가 제공되는 순간 플레이어의 몰입이 깨지기 때문에 이는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플레이어에게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어떻게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플레이어 스스로 발견하게 할수 있을까?

이런부분에서 리븐이 보여주는 방식은 실로 천재적이라고 할수있다. 예를들어 플레이어가 리븐의 숫자체계를 배우게 되는 부분을 보자면, 플레이어는 학교와 같은 장소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것같은 간단한 게임장치를 통해서 진법과 표기기호를 알수있게 된다. 처음에는 이게 뭔 장치인가 하고 만지작 거리게 되는데 그 장치의 규칙성을 통해 두명의 사람이 겨룰수 있는 도박성 게임장치라는 걸 깨닫게 되고 변화하는 기호로 인해 이것이 특정 숫자를 나타낸다는것을 알게 된다.

이 장치는 단지 플레이어에게 리븐의 숫자체계를 일깨워주기 위한 제작자의 작위적인 도구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디자인 자체에서 게임 세계의 문화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지는쪽이 상어에 잡아먹히는 이 장치의 디자인은 리븐의 역사와 스토리에 큰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보게되는 낙서와 처형대를 통해 이 디자인의 의미를 깨닫고 나면 플레이어는 이 게임의 치밀한 디테일에 감탄을 멈출수가 없다.

리븐의 모든 퍼즐은 이 게임장치와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처음엔 너무나 이질적인, 도저히 용도를 알수없는 구조물을 만나게 되고 최소한의 정보, 혹은 조작과 경험을 통해 구조물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구조물의 용도를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드러나게 되고 플레이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답이 나오게 된다.

일반적인 어드벤쳐 게임에서는 퍼즐은 단지 스토리의 전개를 막는 장해물의 역할을 하고 스토리를 풀어나가는것은 등장인물과의 대화나 컷신이다. npc의 대사나 컷신이 나올때는 플레이어는 수동적인 입장이 되고 결국 진행되는 스토리는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어 나간다는 느낌이 아닌 구경한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퍼즐을 풀고나서 스토리를 따로 감상한다는 순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리븐은 퍼즐 그 자체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퍼즐을 푸는 행위가 곧 스토리를 진행시키는것과 다름없게 된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스토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서 일반적인 어드벤쳐 게임에서처럼 방관자 혹은 캐릭터조종자의 느낌이 아닌 나 자신이 게임의 주인공이고 주체라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npc와의 대화나 컷신을 통한 스토리 진행도 존재한다. 하지만 스토리 진행의 대부분은 퍼즐의 해결과 함께 '깨닫게' 된다. 과거에 이곳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전부 퍼즐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것이다. 아무도 직접 설명해 주지 않는다. 리븐의 주민들은 낮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지구인인 주인공과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

스토리와 퍼즐의 연계는 퍼즐을 풀면 스토리를 알게되는 일방통행이 아닌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걸 의미한다. 스토리를 알게 되면 퍼즐을 풀수 있는 실마리를 잡는것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꾸준하게 스토리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끊어진 스토리의 퍼즐 조각을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 넣어봐야 한다. 리븐은 이런식으로 끊임없이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요구한다.

이러한 천재적인 퍼즐 디자인은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적절한 난이도를 통해 플레이어와의 두뇌싸움에서 밀고 당기기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준다.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답이 보이게 되고 답이 보일것 같으면서도 잘 안나오는 듯한 이 연애질의 고수와 같은 난이도는 게임에 엄청난 중독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퍼즐 자체의 재미에 스토리를 알게되는 재미까지 더해졌으니 도저히 그만둘래야 그만둘수가 없는것이다.

막혀있는 퍼즐을 푼다는 느낌보다는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영화나 소설속의 주인공이 된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고 할까? 필자는 리븐을 플레이하는 동안 머리속에서 리븐 외의 모든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가끔 밥먹는것도 잊고 멍하니 퍼즐의 해답을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자면서 꿈에서도 리븐의 퍼즐을 풀고 있을 정도였다. 리븐을 플레이하는 일주일동안 내 현실의 삶은 완전히 피폐해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몰입은 퍼즐의 완성도 뿐만이 아니라 게임내에 몰입을 부수는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작인 미스트에서는 퍼즐이 우선이었고 세계관은 그 다음이었다. 세계관과 퍼즐이 충돌하면 우선 퍼즐에 자리를 내주고 세계관은 그냥 대충 때웠던 것이다. 그러니 마치 퍼즐을 위해 존재하는 말도 안되는 세계처럼 느껴지고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리븐에서는 모든 퍼즐이 탄탄한 세계관 위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있다. 게임플레이와 게임세계간의 오류가 없기 때문에 아주 마음놓고 몰입하는게 가능하다.

이 몰입성을 높이는데 또다른 원인은 게임진행의 비선형적 구조이다. 그래픽 어드벤쳐 게임이란 대부분 정해진 스토리 위에서 일방적인 진행을 따르는 선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토리텔링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점이 플레이어를 게임의 주체가 아닌 방관자로 내몰고 몰입을 방해하는 크나큰 요소가 된다. 아무리 뛰어난 스토리를 보여주더라도 플레이어가 길을 선택할수 없다면 게임의 본질로부터는 멀어지는 것이다.

미스트는 이러한 선형적 어드벤쳐에 어느정도 선택의 요소를 제공했다. 5개의 에이지중에 원하는 에이지를 선택해서 클리어하는게 가능했다. 그러나 하나의 에이지에 들어가면 그 에이지를 클리어할때까지 다른 에이지로의 출입이 금지된 미스트의 구조는 완전한 비선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5개의 선택인 것이다.

리븐은 미스트에서 한발 더 나아가 5개의 섬을 제공하고 거의 완전한 비선형적 접근을 허용한다. 이것은 다수의 퍼즐을 순차적이 아닌 한번에 다 만날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때문에 현실성과 몰입성이 극대화 되었지만 선형적 진행에 익숙한 어드벤쳐 게이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리븐은 실제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다고 과장되어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비선형적 진행은 rpg유저들에게는 익숙한부분이다. 지금 풀리지 않는 문제는 저널에 기록해놨다가 다른것들부터 진행하다 보면 힌트를 얻게 된다는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선형적 진행때문에 저널에 기록하는 습관이 전혀 없는 어드벤쳐 게이머에게는 도저히 안풀리는 문제를 내버려 두고 다른곳으로 가기가 힘들 뿐더러 안풀리는 문제가 한두개를 넘어서 많아지기 시작하면 공황상태에 빠지는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는 간단한 기록을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다. 실제로 게임 패키지에는 빈 노트를 제공하고 있으며 매뉴얼에도 기록하면서 진행하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리븐에는 끝없이 주절거리는 npc도 없으며 수많은 등장인물과 마을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은 일지들은 게임안에서 입수가 가능하다.

일반적인 rpg에서는 기록할게 너무나 많아서 게임을 끝내고 보면 노트한권 분량이 될때도 있지만 리븐은 그정도로 기록할게 많지는 않다. 게임 끝날때까지 3장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런 가벼운 기록의 행위또한 게임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준다. 마치 실제 미지의 지역을 탐사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선형 진행으로 인해 스토리는 상당히 간략하다고 할수 있다. 전형적인 '사악한 마법사로부터 공주 구하기'라고 할수 있는 진부하고 간단한 스토리는 구해야 할 공주가 내여자가 아니라 친구의 여자라는 사실과 사악한 마법사도 그만의 논리와 정당성을 가짐으로서 지나친 유치함과 진부함을 살짝 빗겨가고 있다.

거기에 세상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신들(게다가 아버지와 아들)끼리의 싸움, 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나타난 이방인, 세계의 종말, 엑소더스와 같은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간략하지만 거대한 스케일을 느끼게 한다. 이리저리 꼬지않고 뭔가 새로운걸 보여주려는 시도도 없지만 아주 효과적인, 강력한 스트레이트같은 묵직한 파워를 전달한다.

이러한 원형적인 이야기는 책으로 볼땐 심심하지만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체험하는 게임세계에서는 왜 이러한 이야기가 인간에게 원형적인 이야기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너무나 뻔한 공주구하기라도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되면 공주를 구하는 순간 그 기쁨과 감동은 이루 말할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힘들게 구한 공주가 남한테 가버리고 나는 빈손으로 돌아와야 하는 순간이 오면 살짝 멜랑콜리한 기분이 들어서 여운도 남는다.

이러한 감동은 게임이 조금이라도 몰입을 깨는 부분이 있었다면 절대 느낄수 없었을 것이다. 왜 훌륭한 스토리 보다도 게임플레이가 더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리븐은 게임에서 스토리텔링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라고 할수 있다.

리븐의 장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비주얼 디자인을 절대 빼놓을수가 없는데 난 지금까지 어떤 게임에서도 이정도로 완벽하고 프로페셔널한 아트웍을 본적이 없다. 기본 컨셉은 아프리카 토속문화에 스팀펑크를 섞은것 같다. 리븐의 주민들이 사는 거주지나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낙서나 기호들은 Dogon부족의 문화를 떠올리게 하고 겐이 건설한 구조물들은 스팀펑크풍이다. 원시적이고 원형적인 세계에 오버테크놀러지로써 스팀펑크는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할수있다.

겐의 구조물들은 철저하게 기능을 위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멋이나 부리기 위해 휘황찬란한 장식물들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압도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굉장한 존재감을 가진다. 거대한 황금색 돔이나 여기저기 박혀있는 거대한 단도들을 보면 그 정체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아주 신비한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냥 신비로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스토리가 차차 밝혀지면서 이러한 모든 구조물들이 그 용도를 드러내면 그때까지 괴상하게만 보이던 물건들이 그 용도에 너무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밀이 밝혀지면서 신비로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완벽한 개연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비주얼 디자인마저 게임플레이에 완벽하게 녹아있는 이유는 제작자가 초일류 비주얼 디자이너라는 사실 때문이다.

리븐의 게임 디자이너는 두사람인데 한명은 미스트에서 음악을 맡았던 Robyn Miller이고 나머지 한명은 Richard Vander Wende라는 비주얼 디자이너이다. 이사람은 원래 영화쪽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윌로우와 이너스페이스의 컨셉디자인을 맡았던 초일류급 비주얼리스트이다. 게임제작은 리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처음 도전하는 매체에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걸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게임쪽에서만 일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얼마나 질이 떨어지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이들의 주 분야가 굳이 게임과 관련이 있다면 게임의 겉 껍데기(음악과 미술)일 뿐인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 한테 맡기니 핵심인 게임플레이와 겉 껍데기가 완벽하게 조화되는 이런 웃기는 상황을 보면 게임 디자인이란게 사실은 아무나 할수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비주얼뿐만 아니라 음악도 기가막히게 게임분위기와 어울린다. 앰비언트류의 전자음악을 사용하는데 놀라울정도로 장면과 음악이 어울리기때문에 음악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때가 있다. 화면에서 어떤 장면이 등장하면서 플레이어도 갑자기 순간적으로 공포, 놀라움, 신비로움등의 감정이 폭발하는데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감정 폭발의 원인이 음악이었다는걸 깨닫는다. 플레이어가 특정한 감정을 느낄 상황에서 절묘하게 그 감정을 부채질하는 음악이 나오는것이다.

이것은 플레이의 대부분이 아주 정적인 게임에서 짧은 순간 플레이어의 감정을 증폭시킴으로해서 그 장면이 강하게 기억되도록 하는 강세의 효과를 준다. 난 아직도 숲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온 순간을 잊지 못한다. 너무나 놀래서 의자째로 뒤로 넘어갈뻔 했으며 그순간 어떤 음악이 나왔는지 기억도 못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 감정과 절묘하게 일치했던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장면이 그렇게 강하게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임디자인상 어쩔수 없이 정적인 플레이를 해야하는 부분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리븐에서는 이런 게임 디자인적, 기술적 한계를 역으로 이용하는 시도가 굉장히 많다. 그럼에도 그런 시도가 한계에 대한 핑계로 보이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플레이어의 심리를 치밀하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음악, 미술, 게임플레이 모든것이 사실은 모든 경우의 수와 그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느낄 감정을 계산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어 입장의 치밀한 계산은 기본적으로 리븐의 크기가 너무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여기서 규모가 더 작았다면 플레이어는 세계의 협소함 때문에 몰입을 잃었을 것이고 더 컷다면 두사람의 디자이너가 게임요소를 완벽하게 콘트롤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리븐을 '완벽한 밸런스'라고 정의하는 이유이다. 주어진 한계에서 최고의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 게임은 이 게임보다 더 잘 만들수 없다. 도저히 단점을 찾을수 없다는 얘기다.

또한 음악가와 미술가가 만든 게임답게 게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술적인 느낌이 질질 흘러내리는 게임이다. 시점을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는 것조차 마치 멋진 사진작품을 보는것 같아서 장점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엔딩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할수가 없다. 게임역사상 가장 훌륭한 엔딩이라고 하고싶다. 인트로에서 플레이어를 게임 세계에 자연스럽게 몰입시키기 위한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엔딩에서 자연스럽게 게임세계에서 현실로 플레이어를 복원시키는 게임은 리븐이 처음이었다. 이 단순하지만 기가막히게 멋진 엔딩은 미스트를 먼저 플레이하지 않았다면 이해할수 없기때문에 리븐전에 반드시 미스트를 플레이해볼것을 권한다. 미스트의 인트로가 리븐의 엔딩을 설명하며 리븐의 엔딩이 미스트의 인트로를 설명하는 이 완벽한 완결성은 리븐 이후의 후속작이 절대 나올수 없음을 알려준다. 나와봤자 짝퉁이라고 철저하게 마침표를 찍어준다. 실제로 제작사는 리븐을 만든후에 미스트의 판권을 ubi에 팔아버렸다. 더이상 후속작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미스트와 리븐을 만든 사람들은 진짜 예술가들이다. pc게임 사상 유래가 없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핵폭탄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놓고는 남들은 실컷 울궈먹을수 있을만큼 후속작으로 한 5편쯤은 만들어야 도달할수 있는 이런장르의 최고 경지를 단지 첫번째 후속작에서 완성해버리고는 미련없이 시리즈의 끝을 내버렸다는것은 이들이 장사꾼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리븐은 게임을 넘어선 하나의 '체험'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의 잊을수 없는 모험을 제공한 이 두명의 제작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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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쇼크 (Bioshock)

발매년: 2007
제작사: 2K Boston
유통사: 2K Games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Hard



내가 바이오쇼크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때는 시스템쇼크2의 출시후 몇년후인 2002년쯤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확실하지는 않다.) 이 소식을 들었을때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모른다. 그당시 둠3의 그래픽이 한참 화제에 올랐을 때였는데 둠3의 그래픽을 보는순간부터 내 머릿속에선 저런 그래픽으로 시스템쇼크를 플레이하는 장면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바이오쇼크는 내 첫번째 기대순위에 올라와서 출시때까지 내려온적이 없었다.

바이오쇼크에 대한 온갖 인터뷰와 프리뷰, 스샷등을 닥치는대로 주워모았고 게임의 디자인에 대한 내용을 읽을때마다 이것은 내가 예전부터 궁극적으로 원하던 바로 그 게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몇년이 지나도 발매 소식이 없었지만 나에겐 더이상 발매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프로젝트리더인 켄 레빈이 언급한 그 디자인대로만 나와준다면 10년도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발매 몇개월을 앞두고 몇개의 플레이 동영상과 함께 본격적인 홍보가 시작되었다. 켄 레빈이 직접 나와서 게임을 소개하고 인터뷰하면서 이게임은 fps라고 강조했지만 난 그것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 소리가 나올때마다 난 마음속으로 그와 영혼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횽아... 팔아먹을라고 애를 쓰는구나... 횽이 아무리 fps라고 구라쳐도 뻥인거 난 다알아 ㄲㄲ'
'(켄 레빈) 어휴~ 내가 입으론 이렇게 말을해도 아는놈들은 다 알지? ㅠㅠ'

그러나 그것이 전부 내 착각이었다는걸 깨닫는데는 게임 실행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예전에 약속했던 AI생태계 시스템이니 시스템쇼크2의 정신적 계승작이니 하는 개소리들은 결국 다 개소리였던 것이었다. 시스템쇼크2의 정신적 계승작은 커녕 정신분열적 사생아라고 할만한 작품이었다. 장르자체를 바꿨는데 이게 어떻게 계승작이 될수가 있는가. 아니 장르를 바꿨다기 보다는 차라리 장르를 제거했다고 보는편이 바람직하다.

시스템쇼크2는 fps와 rpg가 결합된 게임이었다. 거기에서 뼈대라고 할수있는 rpg요소를 통째로 뽑아내고 남아있는 흐물거리는 살들을 모은것이 바로 바이오쇼크인 것이다. 물론 빅대디와 리틀시스터라는 중립 몬스터를 추가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랑했던 빅대디와 리틀시스터, 스플라이서간의 가상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말그대로 중립 몬스터일 뿐이었다. 난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고 바이오쇼크는 둠3 이후로 날 가장 실망시킨 게임이었으며 더이상 게임업계에 어떤 기대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 크리티컬 히트였다.

어쨌든 내 개인적인 실망 스토리는 이쯤에서 접고 도데체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웠는지 하나하나 얘기를 해보겠다. 우선 나는 이 게임을 하면서 계속해서 중간에 뭔가 크게 바뀐 게임이라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애초에는 분명히 rpg로 계획된 게임이 급하게 fps로 계획을 변경하면서 게임의 요소가 절름발이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예를들면 총알구입시스템이 이런 부분인데, 바이오쇼크의 무기체계는 일반fps처럼 제한없이 모든 무기를 들고 다닐수 있으며 각 무기에는 아무런 이유없는 총알 보유 제한이 존재한다. fps에서 이 말도 안되는 총알 제한은 가장 강력한 무기만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난이도가 형편없이 낮아지는걸 방지하는 용도이다. 모든 적이 한방에 죽는 스나이퍼 라이플의 총알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된다면 어떤 플레이어가 다른 무기를 쓰겠는가. 그래서 스나이퍼 총알은 5개만 가질수있다던지 하는 말도 안되는 룰이 존재하는 것이다.

근데 바이오쇼크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총알을 자판기에서 구입해서 쓰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특정 무기의 총알 제한은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것이다. 5발만 가질수 있다고 해도 5발 다쓰면 다시 자판기에서 구입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비선형 구조의 맵이라 자판기는 쉽게 접근이 가능하여 총알이 없어서 무기를 못쓰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것이다. 다만 돈이 떨어지면 못쓰게 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무기당 총알 보유 제한이라는 시스템의 의도와 돈만 있으면 어떤 총알도 구할수있는 자판기라는 시스템이 논리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자판기라는 시스템은 애초에 인벤토리가 있는 상태를 가정하고 만든것임이 틀림없다. 공간이나 무게의 제한을 두고 플레이어가 자신의 전술에 맞게 아이템을 자유롭게 구비할때 자판기라는 시스템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인벤토리가 없음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이런 절름거림은 아이템 제작시스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게임에는 총알이나 퀘스트에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스프링이나 볼트같은 여러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존재하는데 인벤토리가 없다보니 그냥 이런 잡동사니들을 보이면 보이는데로 전부 가질수 있게 되어있다.

특정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a,b,c 세가지 잡동사니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냥 자동으로 가지고 있는것에서 알아서 뽑아가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다니는 잡동사니가 스프링이던 볼트던 꼬마요정이던 mad monkey호의 원숭이머리상이던 아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무슨 총알이 무슨 부품으로 만들어지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저 만들수 있느냐 없느냐만 중요할뿐... 근데 뭐하러 스프링, 볼트, 너트 이따위로 세분화된 잡동사니가 존재해야 하는가. 아이템 제작이 돈넣고 총알 뽑는 자판기와 다를게 하나도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도 인벤토리가 있었다면 의미가 있어지게 된다. 내가 주로 사용하길 원하는 총알이 있으면 제한된 인벤토리 안에는 필요없는 잡동사니는 제거하고 원하는 잡동사니만 줏어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어떤 부품이 어떤 총알을 만드는지 관심을 가지고 알게 되며 그것만 따로 찾게되어 비로소 스프링은 스프링으로써의, 볼트는 볼트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무개념 게임 디자인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바이오쇼크의 잡동사니들에게 애도를... 하여튼 인벤토리만 있었어도 훨씬 좋은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별 의미없는 총알 제한을 둔것에서도 짐작할수 있듯이 역시나 무기의 밸런스같은건 찾아볼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주인공의 화력이 너무나 막강하다. 특히 왼손에서 나가는 마법(이름이 뭔지 기억해 내고 싶지도 않다)들이 너무나 강력하여 종류는 많지만 그중에 한개만 계속써도 모든 적을 상대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 지지고 때리거나 태우고 때리거나 물건을 날리거나... 초반에는 이 마법을 사용한 간단한 퍼즐같은게 있기도 했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이런 요소는 사라지고 긴장감 없는 전투만 지속된다.

데모 동영상에서 보여주던 불로 지지고 열추적 미사일을 쏘는등 이런 창조적인 공격방법을 생각해 내기 이전에 전부다 먼저 죽어버린다. 적들도 강해지지만 주인공이 강해지는 속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드 난이도에서도 중반만 되면 살기보다 죽기가 더 어려워진다. 사진을 찍으면 적들의 약점을 연구한다는 핑계로 적을 더 약화시키고 플레이어에게 여러가지 보너스도 주므로 절대 사진을 찍지 말기 바란다. 안그래도 시시한 난이도가 그림구경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첫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총알도 딸리고 에너지도 얼마 없어서 상당히 긴장감 있게 즐길수 있지만 딱 첫번째 스테이지가 끝이다. 두번째부터 갑자기 총알이 남아나기 시작하고 세번째부터는 일방적 학살이 시작되고 네번째부터는 긴장감을 느낄수 없을것이다. 이런 명백한 슈팅 난이도의 실패는 rpg라면 다른 요소를 봐서 용서의 기미가 있지만 스스로 fps이길 원한 바이오쇼크에게는 용서할수가 없는 부분이다.

사실 진짜 웃기는 점은 아무 패널티 없이 죽어도 되살아나는 공짜 부활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fps라니 개그를 하자는 의도로 밖에 볼수가 없는 이 황당한 시스템은 결국 패치로 끌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 시스템이 있질않나... 하여튼 참 농담같은 걸 많이도 넣어왔다. 그나마 이런것들은 끄고 진행하는게 가능한데 적들의 머리위에 표시되는 체력바는 끌수가 없다. 이 머리위에 둥둥 떠다니는 체력바는 게임 내내 몰입을 가장 크게 방해한 요소였다. 이것도 초기 빌드에는 없던 기능이었는데 정식 제품에는 포함되어버렸다.

안그래도 적들이 별로 종류가 많지 않아서 재미가 없는데 그놈의 체력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 버려서 그냥 모든 적이 체력바로 보이게 된다. 체력바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적들의 애니메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인것 같은데 아쉽게도 플레이어의 시선을 적의 움직임이 아닌 체력바로 분산시켜버려서 전투중에는 잘 눈에 띄지가 않는다.

초기빌드 시연 동영상을 보면 체력바가 있는것과 없는것이 몰입에 얼마나 큰 차이를 주는가 알수 있을것이다. 난 적의 머리위에 체력바가 표시되는 fps는 바이오쇼크 말고 본 기억이 없다. 도데체 이게 왜 필요한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데미지 저항 능력이 있는 적이 있는것도 아니고 빅대디 빼고는 다들 몇대 때리면 뻗는데...

긴장감 없는 전투 덕분에 게임플레이는 중반만 되도 점점 따분해지기 시작한다. 게임플레이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더해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더해지더라도 너무 낮은 난이도로 인해 사용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에 같은 짓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지지고 쏘고, 해킹하고 일지읽고 빅대디 죽이고... 이걸 매 스테이지마다 아무 변화없이 똑같이 하게 되는데 한두번은 재밌지만 3번째 부터는 억지로 하는 노가다 처럼 느껴진다. 중반부터는 게임을 놓지 못하게 하는게 게임플레이 때문이 아닌 스토리의 궁금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스토리로 사람을 낚는 방식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는 뒤에 따로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제작자들은 랩쳐라는 가상 도시를 실제로 구현했다고 실컷 자화자찬을 해댔는데 이것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 주장이다. 최소한 시스템쇼크 시리즈를 해봤다면 말이다. 시스템쇼크의 진가는 레벨이 존재해도 그것이 따로 격리된 장소가 아니라 전부 합쳐져서 하나의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것에 있다. 연구소 레벨에서 필요한 아이템이 병원레벨에 있기도 하고 필요한 자원을 위해서 수시로 지정된 창고를 드나들어야 하고... 모든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레벨을 자꾸자꾸 돌아다니다 보면 이 모든 레벨이 각각의 스테이지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장소의 일부분처럼 느껴지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실제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이오쇼크에서는 모든게 레벨 단위로 시작해서 끝나게 된다.병원레벨에서 발생한 사건은 반드시 병원레벨에서 끝나고 마무리 지어진다. 각각의 스테이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격리된 하나의 닫혀진 공간인 것이다. 이것이 랩쳐라는 가상공간을 거대한 도시라는 느낌보다는 순차적으로 준비된 게임공간이라는 느낌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레벨 디자인도 별로 현실감을 주는 디자인이 아니다. 실제 생활공간으로서의 개연성을 지닌 구조가 아니라 게임 진행을 위한 전형적인 던전형 구조이다.

그나마 극장레벨이 꽤 실제 공간처럼 느껴지는 구조였다. 극장레벨만 합격점이고 나머지는 불합격 주고싶다. 아카디아는 수중속의 식물원이라는 컨셉인데 이 뭐... 그 거대한 수중 도시의 하나밖에 없는 식물원이 마치 좀 커다란 지하실에 인테리어 해놓은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말 다했다고 볼수밖에...

수중 하니까 나오는 말인데 게임내내 수중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를 않는다는것도 언급하고 싶다. 초반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는 막 벽도 무너지고 물도 쏟아지고 상당히 수중도시라는 느낌을 잘 살렸는데 정작 본게임 들어가서는 그런 물로 장난치는 연출이 전무하다. 게다가 대서양 깊은 바닷속에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물색깔이 너무 옅어서 깊은 바닷속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수족관 구경온거같은 느낌이다.

Deus Ex의 후반 수중 연구실의 그 공포스러운 칠흑같은 수중의 느낌이 그리웠다. 거기서는 나가면 바로 수압에 뒤질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랩쳐는 심해는 커녕 얕은 강도 아니고 건물 내에 있는 수족관 같은 느낌이라 심해의 공포 이런걸 느낄수가 없었다. 수중 도시라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배경 컨셉을 잡고서도 연출이나 게임플레이 부분에 그것이 활용되지 않았다는게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노릇이다.

해킹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도데체 이걸 만들어 놓고 제작자들 스스로 플레이는 해봤는지 의문이다. 진짜로 욕을 할수 밖에 없는 이 해킹게임은 재미도 없고 기발하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고 짜증나고 따분하고 병신같고... 그냥 한마디로 고통 그 자체다. 초반에 몇번 하다가 나중에는 돈이나 해킹툴로 때우게 된다. 돈이 모자라거나 해킹툴이 떨어지면 어쩔수 없이 이 병신같은 게임을 해야하는데 해킹을 한다는 기분도 안들고 긴장감이 들긴 드는데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그런 긴장감이 아니라 똥싸기 5초전인데 화장실에서 사람 안나올때같은 그런 종류의 긴장감이다. 당연히 짜증만 나고 게임 흐름만 깨버린다.

더 웃기는 점은 해킹을 시도하면 갑자기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다. 두개의 포탑이 나란히 있는데 어느 한쪽을 해킹중이면 그 해킹이 끝날때까지 나머지 포탑이나 주변의 적들은 공격을 안하는것이다. 이것 때문에 감시카메라나 포탑의 위협은 거의 제로가 되어버린다. 그냥 전기로 지지거나 잠깐 몸빵하고 해킹하면 전부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스템쇼크2에서 포탑한번 해킹할려면 목숨걸고 해야하는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이건 경비 시스템이 아니라 오히려 침입자를 도와주는 시스템인것이다.

적들의 리스폰 방식도 문제다. 리스폰이 좀 예측 불가능한 랜덤한 맛이 있어야 인위적인 리스폰이란 느낌이 안들고 실제로 맵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라는 느낌이 들것인데 그런 배려는 전혀 없다. 리스폰은 죽어라고 같은 장소에서 시간텀도 없이 계속된다. 여러장소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이미 어디에서 적들이 나올지 알고 준비하게 된다. 좀 랜덤한 장소에서 랜덤한 적이 랜덤한 시간간격으로 나오게 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여튼 정말 게임플레이면에서는 깔게 너무나 많아서 진짜 끝이 안날거 같다.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없다. 그나마 싸우다 도망가는 AI는 조금 괜찮았다. 이걸 내비두면 에너지를 채우고 오기 때문에 도망가면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데 따라가다 보면 다른 적을 만나기도 하고 포탑에 걸리기도 하고... 이런 부분은 칭찬할만 하다. 하지만 구급약기계를 해킹하면 그걸 사용하는 AI가 죽게 만든건 실수였다. 도망가는 놈을 쫒아가는 긴박감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천장에 붙어다니는 적들도 재미있기는 한데 어두운 공간이 의외로 별로 없기 때문에 그다지 깜짝 놀랄만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게 아쉽다.

너무 단점만 지적한것 같은데 사실 바이오쇼크의 장점의 대부분은 이러한 게임플레이 요소보다는 그래픽이나 음성연기 같은 게임 외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다. 특히 그래픽은 정말 훌륭하다. 뭐하나 어설픈 구석이 없이 비주얼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비디오게임에서 유통기한이 가장 짧은것도 그래픽이다. 현재에 아무리 좋아보여도 몇년 지나면 가장 빨리 약발이 떨어지는 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게임을 하다보면 이상하리 만치 극장레벨과 나머지 레벨과의 질의 차이가 현격함을 느낄것이다. 마치 그 레벨만 다른 사람이 만든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처음 극장 레벨에 도달했을때 이야~ 이제부터 게임 시작인가 보다 하는 설레임을 느꼈지만 다음 레벨에서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전체 레벨의 절반정도만이라도 이정도 퀄리티를 유지했더라면 충분히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게임플레이에 대한 얘기는 그만두고 스토리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한다.
이 게임의 스토리 전개 방식은 플레이어가 참으로 할말이 없게 만든다.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고 할 말을 떠올리기가 쉽지않다. 이 게임의 스토리 전개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플레이어 : 음... 이거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거 같은데...
게임 : ㅋㅋㅋ 좀 반전이 있지...

좀더 진행후

플레이어 : 야 이거 뭔가 앞뒤가 안맞는거 같은데... 도저히 스토리를 예측 못하겠다.
게임 : ㅋㅋㅋ 아주 끝내주는 뒤통수를 후려갈길 반전이거든...

더 진행후

플레이어 : 아니 이제 후반인데도 전혀 짐작을 못하겠다. 도데체 이걸로 어떤 반전이 나온다는거야? 아 궁금해 미치겠다. 빨리좀 알려줘~
게임 : ㅋㅋㅋ 알고 싶냐? 자 충격먹을 준비를 하라고~

더 진행후

플레이어 : 하악하악 나 이제 더이상 못참음 너무 기대됨 빨리 알려주셈 이미 게임플레이는 잊었음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뭔가가 나오는거야? 하악하악~
게임 : 그러니까 그게말이지... 짜잔~ 사실은 너가ㅇㅇㅇ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레이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플레이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새끼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발 죽을래?
게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죄송

...

게임은 시종일관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이 없는 일방적인 미션을 강요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데 어떤 설득력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 내내 절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수가 없다. 그래놓고는 최후에는 그게 사실 스토리의 설정이었다고 너무나 구차한 핑계를 댄다. 지금까지 내가 해본 모든 게임중에 최고로 웃긴 개그였다.

게임에서는 언제나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선택'이라는 요소가 가장 큰 골칫거리 였다. 수많은 개발자들이 자신만의 '선택을 제공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연구해왔다. 왜냐하면 '선택'이야말로 게임 그 자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영화나 소설과 다른 이유는 이것 말고는 없다. 사실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는 실제와 같은 '선택'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는것이다.

그런데 이 바이오쇼크를 만든 사람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한 적이 없는 기똥찬 방법으로 이것을 해결하였다. 스토리상 주인공은 선택을 할수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것이다. 정말로 충격적인 해결 방법이 아닐수 없다. 너무나 고차원 개그라서 할말이 없어질수밖에 없다. 그냥 다 때려치고 잠이나 쳐자고 싶게 만들어 주신다.

이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유전자 조작이라는 핑계로 전부 합리화해버린다. 무슨 유전자 조작이 마법이냐? 이 게임의 스토리에서 유전자 조작이야말로 모든 억지를 한번에 해결해주는 만능 열쇠이자 Deus ex machina이다. 이 병진같은 스토리를 전부 드러낸후부터 엔딩까지는 멀지않다는점이 그나마 다행이지 그 후로도 게임이 길었다면 난 아마 엔딩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병신같은 스토리가 하필이면 훌륭한 음성연기와 대사를 만나서 더 그 병신같음이 돋보여진다. 차라리 처음부터 병맛나는 대사에 음성연기였으면 스토리에 기대도 하지 않았을테고 역시 병맛이네~ 하면서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면에서 게임이 낚시성이 짙다. 제작자의 개구라 낚시 발언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갑자기 훌륭한 레벨을 하나 딱 집어넣어서 낚시를 하고 아주 좋은 음성연기와 대사로 스토리에 집중하게 만들었다가 크게 뒤통수를 치고...

이제 그만 결론을 내리겠다. 이 게임은 좋은 rpg가 될수 있었던 게임 컨셉을 가지고 억지로 fps를 만들었지만 결국엔 fps로도 실패한 이상한 게임이라고 평하고 싶다. 장점이 존재하지만 그 장점이 단점을 커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단점을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해버렸다. 마치 상반되는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같이 만든것같은 그런 분열적인 게임플레이 요소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도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끝까지 진행하게 하는 힘이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다만 그것이 낚시성에 의존한 효과였기 때문에 엔딩을 보면 만족감이 아닌 후회가 밀려온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말이다.

자 이제 평가의 시간이다. 리뷰 내내 온갖 악평을 해댔지만 그래도 이만큼 많은 악평이 나왔다는건 그만큼 뭔가 들어있는게 여러개 있으니 악평이라도 할 건덕지가 여러개 있다는 얘기다. 최소한 맵구조는 비선형이니 만큼 돌아다니면서 그래픽 구경하는 재미는 있다고 할수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fps와 같은 별 한개 쉬레기등급을 받을 만한 게임은 아니다. 사실 내가 이 게임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과 배신감을 고려하자면 별 한개도 많겠지만 내 감정과 게임의 객관적 평가는 별개이다.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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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 (Myst)

발매년: 1993
개발사: Cyan Worlds
유통사: Broderbund Software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없음



저는 어드벤처 게임의 퍼즐을 크게 두가지 부류로 구분합니다.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퍼즐과 논리력을 필요로 하는 퍼즐이죠. 전자는 주로 코믹 어드벤처나 판타지스러운 배경의 어드벤처에서 자주 나오는 퍼즐이고 후자는 주로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하거나 코믹스러움이 배제된 게임에서 잘 나옵니다.

그러나 포인트앤 클릭 어드벤처에서는 압도적으로 상상력을 필요로한 퍼즐이 많습니다. 어드벤처게임의 세계는 현실과 매우 다른 종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죠. 보이는 물건들은 언제 쓰일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챙겨야 하며 아이템이 원래의 방식으로 기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주변에 널린 도구가 게임에서는 전세계에 하나뿐일때도 있습니다 . 어드벤처게임은 현실의 논리를 구현하기엔 제약이 너무 많기때문에 오히려 넌센스적인 세계를 내세워 넌센스적인 문제 해결을 정당화 하기도 합니다. 다른 장르보다도 어드벤처에 코믹게임이 많은 이유도 이런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상력이 빈곤하고 창의력이 떨어지는 저같은 인간에게 어드벤처게임의 퍼즐은 어려운 수준을 벗어나 거의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루카스아츠나 시에라의 어드벤처를 웍스루없이 끝낸적이 없습니다. 특히 시에라의 어쩌구퀘스트 시리즈들은 인간의 상상력의 극한을 요구한다고 느낄때가 많습니다. 항상 막힌 퍼즐에 머리를 쥐어짜다가 결국 패배를 선언하고 답을 보면

"시에라 이@#$@@#$%#들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외치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에게는 닿을수있는 상상력의 한계가 있고 이 한계치를 넘어간 퍼즐은 그 사람이 아무리 오래 생각해봐야 해결할수가 없다는 깨달음만을 남겨주었더랬죠.

그러나 어드벤처게임이 곧 루카스아츠와 시에라이던 시기에 우뇌가 발달하지 못한 불쌍한 게이머에게도 한줄기 희망이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미스트였습니다. 미스트의 거의 모든 퍼즐은 상상력이 아닌 논리력을 필요로 합니다.

미스트의 퍼즐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한곳에 모아두고 높은 시점에서 그것을 천천히 바라보면 저절로 해답이 보입니다. 밑도끝도 없는 상상의 나래는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구퀘스트시리즈는 1+1은 3일때도 있고 0일때도 있지만 미스트에서는 1+1은 절대로 2입니다. 아무리 퍼즐이 어려워도 논리라는 붙잡고 비빌 언덕이 있는것입니다.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아직 필요한 정보를 모으지 못한것이거나 모은 정보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더라도 약간의 끈기만 발휘한다면 결국 풀립니다.

물론 게임에서 끈기를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미스트는 독특한 세계관으로 계속 흥미를 자아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합니다. 미스트의 게임 구조는 처음 하나의 에이지(세계)가 주어지고 그 에이지에서 다른 4가지 에이지의 통로를 찾아 이동하여 마지막 에이지의 단서를 얻는 구조입니다. 처음 에이지의 도서관에는 각 에이지에 관한 기록이 있어서 다른 에이지로 이동하기전에 그 기록을 읽으며 미리 정보를 얻고 머리속에서 상상을 합니다.

기록을 읽으며 상상한 에이지를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직접 방문하는 재미는 매우 특별합니다. 물론 결과는 대부분 기대를 무너뜨리는 수준이지만 마치 책으로 읽은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면서 그 이후에 이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듭니다.

저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게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의 세계가 그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이 아닌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세계라는 느낌을 줄때 게이머는 게임만이 가지는 '체험'이라는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미스트에서 아쉬운점은 이러한 세계가 퍼즐에 기반을 두고있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 퍼즐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퍼즐자체는 논리적이지만 그 퍼즐이 존재하는 공간은 전혀 논리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왜 이곳에 이런 퍼즐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점이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관념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퍼즐을 푼다는것은 묘한 아이러니와 함께 초현실적 공간에 현실성을 부여하면서 공포감마저 조성합니다. 아마 이점이 미스트만의 유니크한 분위기가 아닐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트의 치명적인 단점은 규모와 난이도의 문제입니다. 각 에이지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하나의 세계라고 불리기에는 민망할 지경이고 퍼즐의 난이도도 너무 쉽기때문에 거의 한번에 해결되는 수준입니다. 이런점이 게임의 플레이타임을 극도로 단축시켜버리기 때문에 웍스루 없이도 끝내는데 하루면 충분합니다.

엔딩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엔딩을 보면 드는 느낌은 이제 끝났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제 시작한다는 느낌입니다. 짧은 플레이타임과 더불어 완결성이 없는 엔딩은 마치 풀게임이 아닌 데모게임을 즐긴듯한 느낌이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후편인 리븐을 플레이하고나면 단지 느낌이 아닌 사실이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진짜로 미스트는 리븐의 데모격인 게임입니다. 드라마로 치자면 파일럿 에피소드에 해당하고 영화로 치자면 예고편에 해당하고 소설로 치자면 프롤로그에 해당하고 요리로 치자면 전채요리에 해당합니다. 분량이나 스토리나 퍼즐의 난이도나 전부 그렇습니다.

따라서 미스트를 하나의 단일게임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미스트를 끝냈다면 반드시 리븐을 해야하고 리븐을 제대로 플레이하려면 반드시 미스트를 끝내야 합니다. 미스트는 리븐의 일부라고 표현하는게 맞겠죠. 미스트를 단일게임으로서 평가한다면 아이디어는 빛나지만 내용은 부실한 게임정도로 평가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미스트는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미스트를 기점으로 루카스와 시에라표 어드벤처는 몰락하고 미스트류 어드벤처가 범람했죠. 아마도 저처럼 우뇌가 발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CD의 대용량을 활용한 충격적인 (물론 그당시 기준입니다) 그래픽도 한몪 했겠지만 이후의 미스트 클론들은 미스트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너무 이런쪽으로만 기울어졌었죠.

상상력이 아닌 논리력을 요구하는 미스트는 같은 장르면서도 그 이전의 어드벤처게임과는 대척점에 선 게임이었습니다. 때문에 미스트는 이전 어드벤처팬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고 어드벤처 몰락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미스트는 천재가 아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도 노력만 하면 스스로 엔딩을 볼수있는 어드벤처게임도 존재할수 있다는걸 보여준데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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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Planescape: Torment)

발매년: 1999
개발사: Black Isle Studios
유통사: Interplay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Highest



이 안타까움을 어디서부터 표현해야할까? 플레인스케이프 : 토먼트 (이하 PST)를 플레이하는 내내 부족한 부분들 때문에 엔딩을 볼때까지 말그대로 Torment를 느끼며 플레이 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게임매체에서 명작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PST에 대한 나의 최후의 인상은 결국 '망가진' 게임이었다.

먼저 본인은 결코 흠이 많은 게임에 대해 인색하지 않은 태도를 지녔다는걸 알리고싶다. 오히려 자잘한 버그들, 불편한 인터페이스, 게임 캐릭터의 외모, 타격감 같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느낌 따위의 게임외적인 부분들로 게임 자체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행위를 가장 경멸한다. 여러 요소들이 적당한 수준으로 구현된 게임보다는 나머지가 부족하더라도 다른 게임들과 차별되는 한가지 특별한 장점이 있다면 더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PST는 명백하게 스토리라는 한가지 요소에 모든것을 집중한 게임이며 이것은 잘만 구현됐다면 필자가 침을 날리며 칭찬하는 몇 안되는 게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PST는 애초에 시작부터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플레이하는 내내 본인을 Torment에 몸부림치게한 아쉬운 요소들을 이제부터 하나하나 나열해보기로 하겠다.

우선 PST에 쓰인 게임 엔진은 발더스게이로 유명한 인피니티엔진이다. 이 엔진을 쓴 게임을 하나라도 해봤다면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다지 여러 장점이나 확장성을 보여주는 엔진은 아니라는걸 누구라도 알수있을 것이다. 인피니티엔진은 오로지 D&D의 전투룰을 실시간으로 구현하는데만 촛점이 맞춰진 엔진으로 rpg에서 필요한 생활감이나 게임세계의 생동감 같은 시뮬레이션적 요소나 오브젝트에 스킬이나 다양한 행위 명령어를 사용하는 어드벤쳐적 요소는 전무하다.

이 선택이 바로 PST의 최악의 실수인 것이다. 스토리를 가장 큰 기둥으로 잡은 PST가 어드벤쳐적인 요소가 가장 부족한 게임 엔진을 쓴데부터 큰 문제가 발생하는것이다. 전투외에 플레이어가 게임내에서 할수있는 요소가 npc를 마우스로 클릭한 후 대화 지문 고르는 행위밖에 없으니 스토리진행에서 플레이어를 게임에 참여시키지 못하고 거의 방관자로 몰아내는 것이다.

게임내의 주인공인 '네임리스원'은 결코 플레이어 자신의 분신이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역사가 있으며 자신만의 행동양식과 태도가 있기 때문에 대화지문에서 플레이어는 그저 네임리스원의 가능성 중에서 택할뿐이고 이것마저 지능, 지혜, 카리스마라는 스탯의 수치에 의해 제한되어진다. 따라서 결국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대화지문도 아니고 레벨업 때마다 찍는 스탯 수치뿐인 것이다.

혹자는 지문에 선과 악, 어중간함을 고를수 있는 선택권을 주지 않느냐고 반문할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모든 경우에 주어지는것이 아니고 그게 주어진다고 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것이 문제다. 정해진 스토리상 선쪽으로 가는게 항상 더 큰 보상으로 이어지는데 누가 진지하게 악성향의 지문이나 어중간한 대답으로 경험치나 밝혀지는 스토리를 거부하겠는가.

게임에 전투가 전혀 없는 과거의 순수 어드벤쳐 게임들을 보자. 초기의 텍스트 어드벤쳐는 무한대의 동사를 제공함으로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무한한 해법의 시도가 가능했다. 이후의 그래픽 어드벤쳐에서도 Use, Pull, Push, Give, Look at, Pick up등 최소한 몇가지의 동사를 제공하여 플레이어에게 게임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rpg의 자유도를 포기해서까지 스토리의 강화를 노렸다면 최소한 어드벤쳐 수준의 전투외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했다.

그렇다고 PST가 파이날 판타지 식으로 스토리는 그저 감상의 목적이고 전투에서 재미를 느끼라고 만들어진 게임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전투가 심하게 재미가 없다. 모드론 미로에서의 전투나 후반의 카케리 및 커스트에서의 전투는 실로 지루하다 못해 Torment를 느끼게 만들 지경이다. 똑같은 괴물들, 별 마법이나 속임수등을 쓰지않는 그저 몸빵뿐인 괴물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데 도데체 무슨 재미를 느끼라는 것인가?

좋다 이제 스토리를 풀어가는 어드벤쳐로서의 재미도 포기하고 전략적인 전투의 재미도 포기하고 감상의 관점에서 스토리를 보도록 하자. 이제부터 천기누설이 포함되어 있으니 PST를 진지하게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조심하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PST의 스토리를 칭찬한다. 여러 게임매체에서 최고의 스토리 어쩌구 하면서 뽑을때도 항상 끼는게 PST이다. 그러나 필자는 결코 PST의 스토리가 좋다고 생각할수가 없다. 게임으로서의 관점으로 보면 플레이어에게 다음 1시간을 더 플레이 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스토리텔링의 관점으로 봐도 지나치게 밋밋하다.

물론 설정은 좋다. 각종 고대 종교 및 신화가 짬뽕된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기억을 잃어버린 불사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얘기에서 설정이 나쁠 가능성은 작가가 병신이 아닌이상 없다고 봐도 좋다. 문제는 내러티브를 풀어가는 플롯이 형편없다는데 있다. 중간에 어떤 반전이나 플롯의 꼬임도 없이, 아무 기복이 없이 끝까지 그냥 밋밋하게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자신의 정체를 알려면 래벌을 찾아가라고 한다. 래벌을 찾으면 트리아스를 찾아가라고 한다. 트리아스를 찾으면 해골기둥을 찾아가라고 한다. 해골기둥을 찾으면 후회의 요새로 가라고 한다. 후회의 요새에 가면 자신의 이전 화신이 나타나 이미 짐작하던 것들을 별 재미도 없이 얘기해준다. 그리고 뻔한 최후의 대결.

수많은 재미있을수 있던 요소들을 그냥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다. 예를들면 파로드의 존재이다. 별 생각없이 행하던 자신의 악행때문에 사후에 지옥에서 환생할것이라는걸 알게되자 그것을 피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던 파로드는 명백하게 주인공 네임리스원의 거울상이다. 이런 캐릭터를 시작할땐 중요한 인물처럼 꾸며놓더니 얼마지나지 않아 바로 죽여버린다. 파로드가 죽지않고 후반까지 주인공과 더 많이 관계되었다면 더 흥미로운 스토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동료들의 스토리도 허무하게 낭비된 부분중 하나이다. PST에서 동료들과의 유대감은 스토리상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할만한 꺼리가 별로 없다는게 또 하나의 단점이다. 동료들 각각의 사연이 있지만 전부 과거의 일들이고 그저 듣는데서 그치고 만다. 동료들의 사연과 연관된 퀘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퀘스트 해결중에 끼어들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물론 중간에 몇마디 하긴 한다. 초반에 잠깐.

안나, 그레이스, 노돔의 과거는 주인공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얘기를 듣게 되더라도 어 그랬냐? 수준에서 머물뿐이고 이그너스와 베일러는 과거의 얘기가 너무 짧아서 별 흥미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좀 흥미를 끄는게 모트와 다콘의 얘기이며 그나마 유대감을 형성할만한 수준에 도달한 얘기는 모트뿐이다. 사실 게임 전체를 통틀어 모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만이 유일하게 게임에서 집중한 순간이었다. 한마디로 캐릭터로써 성공한 npc는 모트 하나뿐이었다는 얘기다.

플롯이 엉망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에는 이것뿐 아니라 게임의 진행 페이스에도 그 이유가 있다. 처음 시작해서 하이브까지의 분량이 거의 게임 전체에서 반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플롯상으로 보자면 발단에 해당하는 부분이 전체의 반인것이다. 대부분의 서브퀘스트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나마 별볼일 없는 수준의 퀘스트 중에서도 이 지역의 것들이 확연하게 낫다. 초반엔 그나마 괜찮은 게임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플롯의 의도가 하이브라는 빈민촌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노동자 지역을 거쳐 귀족지역으로 차츰 높은곳으로 상승해서 시길을 벗어나 다원우주를 여행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거대하고 순환적인 epic삘을 노린것 같은데 각각의 비율이 완전히 망가짐으로 인해서 그 효과는 미미하다. 후반부에는 대놓고 날림인데 특히 커스트와 카케리로 이어지는 트리아스 스토리는 막장을 달린다. 트리아스는 스토리상 래벌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완전 엑스트라급 비중을 보여주고 있다. 트리아스의 배신의 이유, 과정등이 전혀 설득력있게 제공되지 못하고 전제적으로 갑작스럽고 뜬금없다는 인상만을 남긴다.

플롯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짧아지는 내용과 더불어 던전의 디자인도 가면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다. 초반의 하이브 지하토굴을 끝냈을때의 감상은 이거 초반이라서 이렇게 엉성한 거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사실 그 던전이 PST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던전이다. 마지막의 후회의 요새까지 오게 되면 요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하나하나 중간보스들을 격파해 나가면서 마지막보스에게 힘겹게 다가가는 그런 최후의 요새의 느낌은 절대 느낄수 없다. (중간보스 하나가 나오긴 한다.)

그리고 PST에는 rpg역사상 최악의 쓰레기 던전이 등장하는데 바로 모드론 큐브 던전이다. 이 모드론 큐브 던전은 그냥 한마디 악질 농담이다. 악명높은 예전 시에라 어드벤쳐 미로보다 더 재미없고 더 단조롭고 더 의미없는 던전이다. 이 던전을 만드는데 소비된 노동력은 입방체로 된 방 하나를 그리는데 드는 노동력 + 심지어 외모에서조차 아무 아이디어도 없는 몬스터 하나 만드는데 드는 노동력이 전부였을 것이다. 플레이어는 같은 방을 50개 넘게 '손수' 지도를 그리면서 돌아다녀야 한다. 같은 몬스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초반에 큰 야심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작업하다가 스토리상 10퍼센트밖에 못만들었는데 남은 돈과 시간이 반밖에 안남은 제작진의 절망적인 상황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이다. 바이오웨어가 발더스게이2를 만들만큼의 자금과 시간이 PST를 만들때의 블랙아일에게 주어졌더라면 이 초반부의 밀도를 끝까지 유지할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더라도 별로 성공적인 게임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게임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얘기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PST를 마치고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PST의 스토리에서 중요한 메시지인가? PST의 스토리는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성을 바꾼뒤에는 무슨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얘기이다. 네임리스원은 이미 게임 시작하기전부터 본성을 바꾼 존재이다. 이 게임이 시작되는 이유도 본성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성을 바꿔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엔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요한 동료들과의 이별이 너무나 가볍게 다뤄지고 있으며 결론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을 벌기 위해 불사신이 되었는데 그로인해 초월자라는 존재가 생겨서 또다른 잘못이 저질러졌다. 그래서 주인공은 현생에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보단 지옥으로 가서 '벌'을 받는걸 선택한다. 결국 죄지었으면 뺑끼치지말고 그냥 벌받으라는 재미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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